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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권영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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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동영상은 joongang.co.kr [최효정 기자]

나는 을(乙)이다. 항상 부탁하며 살아가는 …

당신은 넘볼 수 없는 성체의 성주

당신 앞에 서면 한없이 낮아진다네

나를 사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당신 눈도장 찍느라 하루해가 모자라네 …

그래도 한밤중에 목말라 자리끼를 찾다가

내 영혼의 옆구리를 한 번 만져본다네

- 김장호(1948~ )의 ‘나는 을(乙)이다’ 중에서

2009년 정초, 나는 30여 년 일했던 신문사를 떠나 한 지방 문화재단 대표를 맡게 됐다. 말인즉 대표이지 도청 예산으로 일하는 하급기관이니 도청 계장·과장이 하늘 같은 존재였다. 더구나 도의회 예산심의 철이 되면 추상같은 젊은 도의원들의 호령에 오금 저려야 했고 툭하면 지방 언론의 ‘호구’가 되어 얼토당토않은 기사로 가슴 졸이고 속상해하는 때였다.

 이 무렵 『나는 을(乙)이다』라는 시집을 받았다. ‘눈 여겨 보는 이 없는 풀처럼, 뜨거운 적의를 내려놓고 몸에 밴 새우등으로 어둠의 갈피에 눈물자국 숨기고 돌아가는’ 을의 삶을 참으로 절절히 대변하고 있었다. 내가 과연 을인가.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제멋대로 남을 재단하고 비난하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적 없는가. 새우등으로 살아가는 진짜 을에게 성주처럼 ‘갑질’을 한 적은 없었던가. 그때서야 나는 반성했다. 자신이 갑이면서 을인 척한 것을, 갑과 을은 돌고 돈다는 사실을. 을의 낮은 자세, 을의 경청의 자세, 을의 봉사의 자세로 살아가자. 그것도 인생의 황혼기에서 깨닫는 그 노치(老痴)여!

 선장과 승무원이 승객을 진정으로 모시는 을의 자세였다면 이번 세월호 참사는 없었을 게다. 관료들이 을이라고 자신을 낮출 그때에야 비로소 재난구조기관이 제대로 작동할 터이다. 세상의 갑들이여! ‘나는 을이로소이다’를 하루 한 번씩만 복창하자.

권영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