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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중립이라 쓰고 매도로 읽는 관행 따랐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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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12년 차 중견 애널리스트인 정동익(39)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애널리스트들이 소신껏 투자의견을 낼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얼마 전 제가 쓴 리포트 하나가 여의도 증권가에서 꽤 화제가 됐습니다. 제목은 ‘미련이 상처를 남긴다’. 국내 대표 조선업체 중 하나인 현대미포조선 주식을 ‘매도’하라는 의견을 냈거든요. 6개월 뒤 목표주가도 15만원에서 13만원으로 낮췄습니다.

 주식을 팔라고 하는 게 왜 이슈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마 초보 투자자일 겁니다.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매도의견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난해 2만5000개가 넘는 리포트 중 매도의견은 10건이 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이번 리포트가 애널리스트 생활 12년 만에 처음 낸 매도의견이었습니다. 그동안 팔라고 권하고 싶은 종목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매도’라고 쓰는 대신 에둘러서 ‘중립’이나 ‘홀드(Hold)’라고 표현하는 게 이 업계의 오랜 관행입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애널리스트는 기업의 현재와 미래를 분석해 앞으로의 주가를 예측하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꾸준히 기업을 찾아가거나 IR 담당자와 만나 정보를 모아야 정확한 분석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매도 리포트를 쓰고 나면 아무래도 그 기업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집니다. 또 매수의견을 냈는데 반대로 주가가 내리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관행이니까요. 하지만 매도의견을 냈다가 주가가 오르면 비난을 각오해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증권사 입장에서도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증권사들은 기업의 회사채 발행이나 유상증자 등을 맡기 위해 경쟁합니다. 그런데 애널리스트가 매도 리포트를 써서 기업들을 곤란하게 만들면 영업에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증권사의 VIP 고객인 기관투자가 역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기관투자가는 대부분 오를 종목을 골라 투자하는 ‘롱 온리(long only)’ 전략을 씁니다. 매수(long)와 매도(short)를 함께 쓰는 롱숏펀드나 헤지펀드가 최근에 등장하긴 했지만 아직 규모가 크진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널리스트가 매도의견을 내면 그 기업 주식을 갖고 있던 투자자들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큽니다. 그동안 몇몇 증권사에서 매도 리포트를 내겠다고 밝히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여의도에는 “‘중립’이라고 쓰고 ‘매도’라고 읽어라”라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애널리스트가 투자의견을 매수에서 중립이나 홀드로 낮추면 매도로 해석하라는 겁니다. 행간을 읽는다고 할까요. 2000년대 초반 각 증권사에 리서치센터가 생긴 이래 10년 넘게 계속돼온 관행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깨고 매도의견을 낸 건 제가 몸담고 있는 한화투자증권의 변화 덕분입니다. 애매모호한 표현 대신 살 종목은 매수, 팔 종목은 매도라고 명확하게 쓰자는 겁니다. 사실 매도의견을 낼지를 두고 회사에서도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장 매출에 타격을 입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주식시장이 활력을 잃은 건 경기나 시장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매수 일변도의 리포트를 낸 증권사 애널리스트에게도 책임이 있다”(안성호 기업분석파트장)는 위기감이 더 컸다고 합니다.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을 떠난 이유 중 하나가 신뢰 부족이었으니까요.

 앞으로도 팔아야 할 종목이 있다면 소신 있게 ‘매도’라고 쓸 생각입니다. 그게 길게 보면 투자자들을 위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두 개 증권사의 노력만으로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겁니다. 미국에선 2000년대 초반 증권사들이 합의해 매도 리포트 비중을 조금씩 높인 덕분에 자유롭게 투자의견을 내는 분위기가 정착됐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증권사 간에 신사협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려 매도 리포트 읽는 법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한 선배 애널리스트는 몇 년 전 매도 리포트를 냈다가 주주들에게 살해 협박 전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쏟아지는 항의전화에 그 선배는 2주 동안 출근하지 못했고 휴대전화와 집 전화번호까지 바꿔야 했습니다. 제 리포트가 발표된 뒤 어떤 분은 이렇게 물어보더군요.

 “이제 현대미포조선 망하는 건가요?”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애널리스트의 투자의견은 기업의 도산 가능성을 나타내는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과는 다릅니다. 앞날이 창창한 기업이라도 주가가 너무 고평가돼 있다면 그 시점에선 주식을 팔아야 합니다. 현대미포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예상실적에 비해 주가가 높아 매도의견을 냈을 뿐 경쟁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주가가 충분히 내려간다면 저는 다시 매수를 권할 겁니다. 

정리=이한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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