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을 따라갔던 산골 빨래터처럼 세속의 먼지 털 수 있는 분위기 아쉬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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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옥누몽』이나 이백의 시를 즐겨 읽으시던 어머님은 여름이면 어린 우리 세자매를 달랑달랑 달리신 뒤 며칠 모아둔 빨래를 머리에 이고 저 고향의 북산초당(개성)으로 밥을 싸가지고 가곤 했다.
그때 어머님 옆에서 작은 빨래를 헹구면서 나는 투명한 물과 풀내음 나는 산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빨래터에서도 어머님은 우리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이백과 두보의 시를 암송한 뒤 그 뜻을 풀이하여주시곤 했다.
그때 나에게 비친 어머님과 자연과의 관계는 마치 현세 어디엔가 이백이 숨어 있다가 자신이 자연에서 받았던 영감을 어머님을 통해 다시 자연에게 되돌려 주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자연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을 회수하는 듯한 경건함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어머님과 자연이 보호자처럼 지키고 있는 곳에서 모래밭을 뛰어다녔다. 그날 집에 돌아오면 우리는 더 잘먹고 잘 잤다.
그때가 내 첫번째의 「바캉스」였을까. 두번째로 잊을 수 없는 것은 동해의 기억이다. 하얀 분모래를 적시는 파도가 바로 보이는 마을에서 서너달을 지냈다.
마을아이들은 조개를 잘 주웠다. 유리알 같이 맑은 뭍 밑에는 하얀 모래가 양철지붕의 물결무늬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는데 아이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모래 속에서 조개를 잘도 찾아내는 것이었다.
모래위로 손톱만한 파란 파래 한잎이 팔랑거리는 그것을 손으로 파면 영락없이 조개였던 것이다.
이 모래를 표식으로 하여 조개는 틀림없이 사냥되었고 아무 것도 모르고 잡혀 나오는 조개의 슬픔을 연민하던 기억이 난다.
이 마을에서 태초 같은 고요와 하느님이 마악 만드신 것 같은 싱싱한 바다와 배 한척과 모래, 그리고 해당화와 달빛 같은 달맞이꽃에 둘러 싸여 인어처럼 사색을 헤엄치다가 서울로 왔었다. 그때의 기억은 깊이 가라앉아 한개의 내면의 바다를 형성하였고 지금도 그때의 바다의 침묵과 고요가 나에게 교훈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사람들에게 무참히 침해받던 광경 또한 잊을 수 없다.
한 두 해전 가족이 서쪽의 한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갔었다. 몰러든 인파 때문에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니라 어깨들을 부딪치면서 몸에 물이나 칠할 정도의 아이들과 뜨거운 낮을 겨우 보내고 밤에는 그토록 그리웠던 밤파도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밤파도 소리는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밤새도록 모래밭에서 노는 사람들의 오락과 분위기에 바치는 무질서한 갈채 때문에 밤 파도 소리는 힘없이 거세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모래밭 위에 세워진 커다란 주점에서는 주객을 유도하기 위하여 확성기로 「볼룸」을 높인 「밴든」소리가 밤을 딸꾹 새우게 만들었다
그것은 자연을 정복해 가는 인간의 기세등등한 소리였던가. 그러나 나는 그들의 용감하고 부끄럽지 않은 인간의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다.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바다에의 환멸을 불러 왔고 환멸은 몇 해 동안 듣고 싶었던 파도소리와, 가지고 가고싶던 소중한 추억과, 꿈의 모래성을 온통 망가뜨렸던 것이다.
「밴든」소리는 도시의 어떤 부끄러운 모습을 질질 끌고 와 그대로 옮겨다 놓은 느낌이어서 우울했고, 숭고한 자연을 모독하는 것 같아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상행위에도 구토를 느꼈다. 「밴든」소리는 이튿날 밤도, 그 이튿날 밤도 피서객의 휴식을 어지럽혔다. 우리는 도망하듯이 거기를 빠져 나왔다. 이제 장마가 끝나면 또다시 찾아올「바캉스」의 계절-
보이는 인간이나 보이지 않는 인간, 보이는 자연이나 보이지 않는 자연을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오늘 문득 네거리에서 만나는 얼굴이 어느날 갑자기 「바캉스」에서 만나는 얼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캉스」는 그래서 인간과 인간이 마주치는 곳이며 또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이 마주치는 곳이라면 웃음이 있고 소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숱한 웃음과 소음을 피해 「바캉스」를 떠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바캉스」는「떠들고 노는」 방종과 소비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내일의 삶을 위한 재창조의 안식처, 내일의 활동을 위한 충전의 휴식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 안겨 보라. 모든 세속의 먼지를 털고 진심으로 안겨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 자연 속에서 「내일을 사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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