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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신일양>(1938)-독립군야사 신일양<제55화> (2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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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20년대 만주의 정치정세는 심히 유동적이었다. 이에 따라 한·중·일·만사이의 여러 가지 관계 역시 복잡다단하였으니 이같이 어지러운 국제정세아래 남·북만 이역에서 활용하는 독립군들의 행동 또한 이러한 영향으로 파란이 심했다.
중앙집권제 정권이 수립되지 못하였던 그 시대의 중국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세력이 난무하고 있었으며 세력에 따라 의견차이가 크게 달라 독립군은 이들 세력에 따라 보호를 받기도 하고 박해를 받기도 했다.
일본은 철도를 가설해 북으로는 「하르빈」에서 남으로는 봉천·안동·대련·여순항에 까지 만주의 대동맥을 장악하여 만철왕국을 이루고 있었으며 또한 일본 관동군이 군사적인 모든 것을 제압하고 있는 남만에 있어서 독립군의 활동은 극히 어려웠다. 따라서 남만엔 한국인 가운데 친일한인이 생겨나기 쉬웠던 것이다.
일본의 독립군 방해는 한인끼리의 동족상잔 강요, 위장 애국단체조직·마적을 이용한 독립군 공격 등 다양했는데 이외에도 중국 관청의 매수·소련군 동원 등으로도 독립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노력과 강압에도 불구하고 만주의 많은 지방정부는 한국인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에겐 호의를 보였고 보호를 해 주었다.
길림성의 장작림이 일본군이 장치해 놓은 폭탄에 사망하고 그 아들 학량이 계위하자 학량은 친일파들을 총살하는 등 한인의 친일파 단속을 엄히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일대 혁신적인 방침이었으니 독립군들과 양민들에 대해서는 적극 협조, 보호책을 썼으며 일본세력에 물들어 있던 일부 한인에 대해서는 큰 탄압을 가했던 것이다.
1927년에 있었던 한중연합군 결성도 이런 배경에 영향을 입었다.
동북만주 일대, 특히 동령산맥은 동북「아시아」 밀림의 중심지로서 흑룡강에 이르기까지 그 길이가 1천여리에 이르는 천년의 원시림이었다.
만주의 수림지대와 대평야에는 마적·??자·녹림신사라고 불리는 집단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관군과 합작하거나 또는 싸워서 이기면 곧 지배자가 되었다. 장작림·마대산 등이 이런 집단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10∼30년대 사이 일본이 만주를 침략해 들어오자 갑자기 이런 유의 집단이 부쩍 늘어났다. 이것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만주를 해방시키자는 만주의 항일운동자들이 큰 뜻을 품고 구국운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들 집단들의 인원은 수백명에서 1만여명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이 집단들의 모두가 항일운동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수가 마적행위 보다는 항일운동에 더 힘을 쏟았다.
이들 집단들의 대표들은 1년에 한번씩 일정한 산림지대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목적은 각 집단의 관할구역을 규제하고 상호불가침 등의 협정을 맺기 위해서였다.
특히 1920년대 후반기엔 이 회의에서 세력을 규합해 중국구국연합군을 조직, 항일투쟁에 힘쓰기로 결정을 보기도 했다.
중국의 이 집단들은 같은 산중에서 생활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한국인 독립군지사들을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아껴주었다.
l927년 3월 중국구국군 제13군사령관 양우일은 그의 참모 손림을 우리 독립군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에게로 보내 장군일행을 그의 진중에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였으니 이것도 모두 한국독립군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협정을 맺었으니 이것이 한국 독립군과 중국 구국연합군과의 합작이었다. ①중국구국군은 한국농민을 보호한다 ②중국구국군과 한국독립군은 합심 협력하여 계획적인 대규모 작전으로 일본군을 만주에서 몰아낸다. ③한·중연합군은 표면상 중앙정부소속군으로 칭한다 등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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