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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 5월의 주제 '3인 3색, 소설가들의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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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하는 ‘이달의 책’ 5월 주제는 ‘3인 3색, 소설가들의 봄’입니다.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3인이 봄을 맞아 발표한 장편소설, 단편소설, 여행기를 한 권씩 골랐습니다. 작가들의 예민한 촉수에 포착된 치열한, 혹은 서늘한 삶의 순간을 음미하며 5월을 시작해보시면 어떨까요.

안나푸르나를 가다, '싸움닭' 본성을 찾다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306쪽, 1만4000원

소설가 정유정은 행운아다. 이야기꾼인 그가 이야기할 욕망을 상실한 나머지 새벽 3시에 통곡하다가 16박17일간 히말라야 종주를 떠나기로 했다는 프롤로그에서부터 직감했다. 저자는 지난해 6월 장편소설 『28』을 출간하고 나서 불씨마저 타버린 잿더미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나선 길에서 저자는 종주도 무사히 마쳤고, 이야기의 불을 다시 지펴 여행기를 썼으며, 고된 길 위에서 자신에 대한 확신도 얻었다. 해피엔딩이다.

 저자가 “안나푸르나행은 생존의 문제다”라고까지 선언했기에 걸음마다 고뇌가 담긴 비장한 여행기가 펼쳐질 줄 알았다. 책장을 넘기니 낄낄 웃음이 나왔다. 생존을 위해 떠난 저자의 종주기가 너무 적나라해서다. 한국 땅을 처음 떠나 본 그에겐 음식마다 들어 있는 현지 향신료 ‘마살라’의 벽은 안나푸르나보다 높았다. 변비로 인해 배 역시 안나푸르나 2봉만큼 튀어 올랐다. “똥을 뿌리며 앞서가는 나귀들이 부러웠다”며 변비 해결을 위해 까끄루(네팔 오이)와 사과에 집착한다. 변비가 해결될 즈음 고산병이 찾아왔다. 저자는 “여기에 왜 왔는지, 기억해보려 해도 생각이 모이질 않았다”고 했다.

안나푸르나 동부 마낭 지역에서 잠시 쉬고 있는 정유정 작가(뒷줄 오른쪽), 왼쪽이 동행한 김혜나 작가다. [사진 은행나무]

 그럼에도 정유정은 멈추지 않는다. 일행의 선두로 선 포터 뒤에서 그는 늘 “까자”(포터는 가자를 까자로 알아들었다)를 외친다.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저자는 태생적인 겁쟁이인 자신을 싸움닭으로 변신시켰다고 했다. 달리지 않으면 고꾸라진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싸움닭으로 살아왔다는 겁쟁이 저자는 종주 구간의 최고봉 쏘롱랑패스(5416m)에 당도하자 한국에서 준비해 간 타임캡슐을 돌탑 사이로 집어넣는다. 그의 등단작, 『내 심장을 쏴라』 플롯노트의 마지막 지문을 오려 넣은 유리병이다.

 그는 주문 외듯 묻는다. “나는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내 인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떤 목소리가 답했다고 한다. “죽는 날까지.”

 안나푸르나의 답을 안고 종주를 마친 그는 그의 본성을 깨닫는다. 종주 끝 휴가라고 잡아 놓은 휴양도시 포카라에서 엿새 동안 그는 쉬지 못하고(쉬는 게 불안해서) 여행기 초고를 쓴다. “나로 말하면 (여행에서) 확신 하나를 얻었다. 나를 지치게 한 건 삶이 아니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링을 좋아하는 싸움닭이요, 시끄러운 뻐꾸기였다. 안나푸르나의 대답은 결국 내 본성의 대답이었다. 죽을 때까지, 죽도록 덤벼들겠다는 다짐이었다. 결론적으로 떠나온 나와 돌아갈 나는 다르지 않았다.”(288쪽)

 저자는 환상종주를 끝내자마자 “히말라야가 그립다”고 했다. 한번 가면 또 가고야 만다는 ‘네팔병’에 제대로 걸렸다. 싸움닭 저자의 스타일대로 다음 소설을 끝내면 에베레스트, 그 다음은 마나슬루, 그 다음은 무스탕에 가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긴 여행은 언감생심이라 해도, 마음 답답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책을 읽으며 낄낄 웃다가 어디든지 짤막하게라도 발을 굴려보는 거다. 관찰자 시점이 아닌 주인공 시점으로 살기 위한 출발선에 섰다고 생각하며. “까자.”

히말라야 종주, 이건 챙기세요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며 트레킹하는 다양한 코스가 있다. 네팔정부가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대중적인 트레킹코스를 개발한 덕이다. 코스에 따라 걸리는 기간은 다양하다. 저자는 그 중 환상종주를 택했다. 마르상디 강(Marsyangdi Nadi)을 따라 오르는 동부 마낭 지역과 칼리간다키 강(KaliGandaki Nadi)을 따라 내려오는 서부 무스탕 지역을 시계 방향이든, 반대 방향이든 도는 코스다. 어느 쪽으로 가든 가장 높은 구간인 쏘롱라패스(5416m)를 지나야 한다는 게 룰이다. 저자는 시계 반대 방향(동→서)를 택했고, 총 17일이 걸렸다. 트레킹 준비물로 필요한 돈·의복·신발·배낭·응급약·잡다한 물건 등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도 많다. 이 책에서 저자가 준비해간 준비물 중 백미는 커피믹스였다. 종주길에 동행한 현지 가이드가 “짜이처럼 부드럽다”며 감탄한 커피를 준비해 가자. 저자가 준비하지 않아 계속 곱씹었던 변비약과 라면도 챙기자.

한은화 기자

페이스북 속의 아내 … 그녀는 진정 누구일까

말하자면 좋은 사람
정이현 지음
백두리 그림, 마음산책
200쪽, 1만2000원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 잘 아는 체하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승옥 ‘무진기행’ 중)

 촌철살인과도 같은 11편의 짧은 소설을 묶은 이 책을 읽으며 이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 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모한 자만심의 발로인지 서늘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시인의 삶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작가는 ‘수십 만개의, 좁고 더 좁고 더더 좁은 골목으로 이뤄진 도시에서 그 골목을 혼자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 모두 어쩌면, 말하자면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고.

 단편 ‘비밀의 화원’ 속 남편은 아내의 페이스북을 몰래 훔쳐보고 당혹감에 사로잡힌다. 그가 아는 아내는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SNS 공간에서 가명을 쓰면서 현실과 다른 가짜의 ‘삶’을 꾸미고 살아가는 아내의 ‘이중생활’을 엿본 남편은 혼란스럽다. 아내는 대체 누구인지.

 SNS의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얼떨결에 가입하게 된 ‘나’의 관찰기이자 경험담인 단편 ‘이미자를 만나러 가다’는 가상공간과 현실의 아찔한 간극에서 비롯한 현기증을 그려낸다. 동창 모임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이미자는 사실 초등학교 때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왕따’였다. 하지만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망각의 강에 빠진 듯, 친구들은 이미자와 낯 간지러운 댓글을 주고받는 친절한 동창생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오프라인 모임에서 평범한 아저씨와 아줌마로 외모의 평준화가 이뤄진 동창들의 모습에 ‘나’는 깨닫는다. 이게 이미자의 복수겠구나라고.

 작가는 “사람들이 잠시 혼자였던 바로 그 순간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잠시 혼자인 그 순간이 오롯이 그 자신일 수 있는 찰나의 지점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존재이며 ‘어떻게든 살아지는 만만찮은’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의 이 부분은 작가가 세상을 향해, 고단하고 외로운 존재를 향해 건네는 다정한 위안으로 느껴졌다.

 ‘나는 당신을 잘 모르지만, 당신이 무척 섬세하고 강인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들꽃처럼 당신은 잘 살아야 합니다. 나도 그러겠습니다.’(단편 ‘안녕이라는 말 대신’ 중)

하현옥 기자

한 남자와 두 여자, 이 불안한 사랑의 끝은 …

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자음과모음, 360쪽
1만3500원

소소하다 했지만 기묘한 풍경이다. 세 사람이 지탱하는 불완전한 사랑 이야기다.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은, 흔히 말하는 삼각관계가 아니다. 소설은 남자를 정점에 놓고 두 여자가 그를 독점하려고 반목하는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세 사람은 서로를 보듬어 안고 한 덩어리가 돼 사랑을 나눈다. 두 여자끼리도. 그들의 관계는 잠정적이고 불온해서 위태롭다. 박 작가의 전작 『은교』처럼 비일상적 풍경이기에 낯설고 조금은 불편하다.

 가상의 도시 소소(昭昭)로 여자 주인공 ‘ㄱ’이 흘러 든다. 사고로 오빠와 부모를 잃었고 첫사랑과의 결혼에 실패한 여자다. 아버지가 남긴 선인장을 애지중지 키워나간다. 그도 속으로 가시를 품고 살며 선인장처럼 간간이 피워내는 꽃을 기다린다.

 그리고 남자 ‘ㄴ’과 또 다른 여자 ‘ㄷ’이 우연히 ‘ㄱ’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ㄴ’은 형과 아버지를 80년 5월의 광주에서 잃었다. 실어증에 걸린 어머니는 요양원에 있다. 방랑하며 살던 그는 몇 차례의 죽음을 목격했고 운명처럼 ‘ㄱ’과 만난다. ‘ㄷ’은 조선족으로 압록강을 건너며 아버지를 잃었다. 자신을 범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어머니는 그 남자의 병 걸린 딸에게 사금파리를 섞은 미음을 먹여 죽음에 이르게 한 드센 여자다.

 그들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는다. 죽음의 언저리에 놓인 채로 살아왔던 세 사람은 각자가 모두 뼛속 깊이 상처받은 존재임을 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하나로 묶이지만 그 관계가 느슨하고 순간적이라는 사실도 세 사람은 잘 알고 있다.

 “지난 일에 대해선 서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상기한다.(중략) 우리 사이엔, 명시적으로 맺은 계약보다 더 단단한 암묵적 계약이 존재했던 게 틀림없다. 첫 번째 계약은 우물이 완성되면 흩어져 각각의 길을 따라 떠난다는 것, 두 번째 계약은 그러므로 우리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동거하는 동안 ‘ㄴ’은 끝없이 우물을 판다. 바닥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우물은 컴컴한 곳에 똬리를 튼 죽음의 그림자이자 서로가 헤아릴 수 없는 끔찍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다.

 소설의 서사는 불분명하다. 그들의 굴곡진 삶은 소소라는 도시에서 포개지지만, 딱히 그렇게 돼야만 하는 결정적 이유는 없다. 소설은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정하기보다 그들의 운명 같은 관계가 굽이치듯 나아가는 동선을 좇는다. 파국을 향해 치달아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내 불안감이 엄습하는 서늘한 소설이다.

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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