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 선생을 곡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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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장기영 선생을 처음 뵈옵기는 1954년 「한국일보」 창간에 내가 말단기자의 한사람으로 참여했을 때였다. 나를 그리로 인권해준 최병우 형이 여러 해 전에 갔고, 이제 「한국」 창업의 주인마저 가셨다는 소식에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다시금 실감되기도 하려니와 이분의 저 억척스러움이 우리 사회를 위해 좀더 발휘되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하는 생각에 못내 한스러움이 앞설 뿐이다.
그 억척스러움이란 일종 통쾌할 정도의 것이었다. 논설이나 중요기사의 「갤리」를 일일이 「체크」하는 신문사장, 야전침대 같은 것을 가져다놓고 새벽녘 강판에서 윤전기 돌아가는 것까지 지켜보는 신문사장은 그때 처음 보았다. 4·19직전의 마산 사건 때는 논설기자까지 현지에 내려보내 전화로 매일 사설을 송고시키는데는 정말 놀랐다.
신문사 안에서 통하던 애칭이 「장 기자」였고, 고인자신도 이 애칭을 과히 싫어하시지는 않는 눈치였다. 탁상일기에는 자작의 경구 몇 가지가 매일처럼 새로이 기록되곤 했다. 『대사건은 일요일에 터진다』는 것도 그런 경구의 하나다. 기자는 일순 방심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분은 늘 새로운 것을 생각해 냈다. 신문이란 항상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면, 고인은 그런 의미에서는 전형적인 신문인이었던 것이다.
고인이 탁월한 신문경영자였다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겠지만, 문장으로도 직업적인 문필가 못지 않았던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한국」 창간 얼마 안되어 처음 미국여행에서 보내온 통신은 뒤에 『태평양공로』라는 책이 되어 남아있지만, 그 엉뚱하고도 섬세한 관찰, 그 유려하고도 당당한 행문은 기행문의 「모델」의 하나로 삼아도 좋을 것이었다. 『신문사장이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아야 되겠습니다. 편집·경영·공무, 이것이 모두 조화가 되자면 그 속을 다 알아야 하니 말이오.』 그래서였던지, 한번은 사장이 직접 편집국장을 겸해서 몇 달 동안 제작을 진두지휘 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인은 당신께서 하신 말씀보다도 훨씬 더 규모가 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경제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관료로서, 정치인으로서, 체육인으로서 당대를 주름잡은 여러 사업에 전신을 불태우고, 또 그것이 훌륭한 조화를 이룬 생이었던 것이다.
역시 「한국」 창간직후의 어느 날 밤. 나는 대취해서 사로 돌아와 젊은 기운에 전화를 한대를 부순 일이 있다. 그 보고를 듣고 빙그레 웃기만 하더라는 후문이었다. 언젠가는 새 전화통을 꼭하나 가져다드리겠다고 별렀건만, 이제는 그 빚을 갚을 길도 영영 없어지고 말았다.
고인이 관료로, 그 뒤에 정계로 투신하신 뒤로는 나의 발걸음도 자연히 뜸해졌었다. 『당신이 처음에 만든 「메아리(단평난)」를, 당신이 다시 와서 써 주어야되지 않겠소』하시던 것은 반농반진이었겠지만, 이렇게 쉬이 가실 줄 알았더라면, 그 앞을 지나칠 때라도 가끔 뵈옵고 말씀이나 들었어야 했을 것을, 그것도 이제는 빈말이 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니 만년인 셈인데 고인이 남북통일 일에 관계하신 일에 나는 더우기 기대와 관심을 가졌었다. 이분 같으면 이 거창한 사업에 무엇인가 전진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제는 지하에서라도 여기에 도움을 주실 것을 바랄 수밖에 없는가.
삼가 가신 분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필자=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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