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열<서울대 음대 교수>|가곡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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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0년래 추위라는 혹한의 날씨에 순천에서 독창회를 가진 일이 있다. 이렇다 할 난방시설을 갖추지 못한 5백석. 남짓의 연주회장은 얼음. 벌판처럼 춥고 상막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예정된「스케줄」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연습을 했다. 순천시의 석유난로는 온통 동원되었는지 무대와 객석을 덮다시피 했다.
관객은 뜻밖에도 객석을 가득 채웠고, 노래하는 나도 그런 분위기에서 압도되어 추위도 아랑곳없이 음악을 통한 따뜻한 공감을 나눌 수 있었다. 노래를 듣고 있는 관객들의 열야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은 요즘 부산에서 가졌던 시향(부산)과의 협연에서도 계속되었다. 3년전쯤 같이 연주회를 가졌을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일들이었다.
이젠 예술의 세계가 서울만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우리나라도 지난 것일까. 지방 도시나 시를 곳곳에 음악을 사랑하고 아끼는 음악 애호가들이 있고, 연주가를 기다리는 무대가 있다. 특히 가곡에 대한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요즈음 TV나「라디오」그리고 일반 무대에서 우리 가곡이 자주 노래되고 사랑을 받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그러나 몇몇 우리 가곡의 한정된「레퍼터리」를 떠나 독일 또는「프랑스」가곡에도 귀를 돌렸으면 싶다.
나는 즐겨 젊은 음악도들에게 예술 가곡을 노래하라고 권한다. 젊은이들은 대개 화려한「오페라」무대를 동경한다. 그러나 주옥같은 가곡만으로도 훌륭한 음악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기쁜 추억, 슬픈 기억들을 간직하고 담은 것을 음악에 승화시키는 것이 가곡이니 만큼 나이가 들고 인생 경험이 풍부해 질수록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라 하겠다.
음악대학 시절, 「하이네」의 시에「슈만」이 곡을 붙인 독일가곡「디히테르·리베」(시인의 사랑)를 처음 배우고 한동안 그 노래에 매혹 당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노래를 부를수록 시보다는 역시「멜러디」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최근 우연히「프랑스」의 미학자「에브린· 로이테」의 책을 읽다가 그 무렵에 느꼈던 것과 똑 같은 내용을 발견하고 여간 기쁘지 않았다. 『음악은 시를 높여 주지만 그를 뛰어넘기 때문에 더욱 높은 경지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음악만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스며들어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정신의 밑바닥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것도 없다는 생각을 나는 늘 하고 있다. 음악은 정신을 맑고 깨끗하게 해준다.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도 깨끗해진다. 음악은 감정을 깨끗이 하고 새롭게 한다. 그래서 음악을 즐기는 국민이 아름다운 정서를 간직할 수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그나마 풍토에서 비롯된 시에 곡이 붙여지고 노래되는 가곡은 각기 그 나라 독특한 분위기를 간직하게 마련이다.
독일의 가곡『리트』가 내면적인 깊이를 가진 노래라면, 「프랑스」의「멜러디」는 좀더 감각적이고 타락적이라는 비유로도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가곡이 인기를 얻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인간의 깊숙한 내면을 노래한 독일 가곡, 생활의 장서를 노래한「프랑스」가곡 등으로 그 수준을 높여 갔으면 싶다.
전국 어디에서고 노래를 즐기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고 음악을 이해하는 수준이 높아질수록 우리들의 내면생활은 더욱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정신생활은 좀더 풍요해지고 각박한 세상살이는 여유를 갖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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