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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6·25 2주전 미에 전쟁위협 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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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0년에 접어들자마자(1월12일) 당시의 미 국무장관「애치슨」은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한국정부는「애치슨」선언을 중시하고 그것이 공산주의자의도발을 촉진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당시의 주미대사 장면은 1월20일 미국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려고「버터워즈」극동담당국무차관보와 만났다.
『장박사는 최근 국무장관이「프레스·클럽」에서 말한 소위「애치슨」선이 한국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기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는 미국이 드디어 한국을 포기했다고 보아야하는가 하는 중대문제를 제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
(「윌리엄즈」동북「아시아」과 직원의「메모」비) 한국정부는 미국이 방위선을 연장하여 한국을 포함시켜 줄 것을 희망했고 4월3일 극동담당국무차관보「러스크」와 만나 회담을 가진 장대사는 한국정부의 희망을 전달하지 않고는「러스크」와 헤어질 수 없다는 집요한 노력을 계속했다.
이 회담에서「러스크」는「애치슨」이 말한 미국의 방위선이란 점령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책임,「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해 등 미국이 군사적 연관을 갖는 서 태평양 지역을 열거했을 뿐이라고 지지했다.
장대사는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계획에서 명백히 제의된 것을 중대시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그렇게 고무적인 것이 못되었다.
미국정계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여전히 무시했고 유력 상원의원「코널리」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한 이승만대통령의 신랄한 비난이 극비로 분류된「드럼라이트」주한 미 대리 대사와 이대통령의 회담에 관한「메모」(5월9일)에 나타나고 있다.
『이대통령은 오늘아침 최근한국문제에 대한「코널리」상원의원의 발언을 거론했다.
이대통령은 한국에서 몇천㎞떨어진데 있는 미국인들이 한국과 3천만국민이 미국에는 전략적 중요성이 없다고 단정하기는 아주 쉬운 일 이라고 신랄하게 말했다.
그는「코널리」발언이 공산주의자에게 한국을 가지러오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며 도대체 제정신 있는 사람이 이런 비이성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이대통령은「코널리」발언이 한국에 큰 해를 끼쳤으며「코널리」의원과 국무성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면 미국의 정책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 군부쪽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5월10일에 있었던 미국방생의「본드」한국문제담당관의 회람「메모」(극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렘니처」소장(당시 군사원조국장)은 현 단계에서 대한군사원조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며 그 이유는 한국이 극동에 있어서 미국의 전반적인 전략적 입장에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고「무초」주한대사도 이에 동의했다.』
한국을 미 방위선에서 제외했다고 미국정치가들이 공공연히 떠들어 댄 것은 한국정부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었고「무초」대사도 이를 우려하고있다.
「러스크」국무차관보에게 보낸 보고에서「무초」대사는 이것을 수 차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정계는 이런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미 미 의회는「트루먼」대통령이 요청한 1억5천만「달러」의 대한군원 요청액에 반도 안되는 6천만「달러」밖에 승인하지 않았고「무초」대사의 한국연안 경비대 강화 및 전투기제공요청도 묵살됐다.
「로버츠」주한미군사고문단장의 5욀5일자 보고에 따르면 한국군의 무기10∼15%,차량 30∼35%가 사용 불가능한 것이고 한국에 50년까지 제공되기로 된 부품도 도착 할 전망이 없어『중국과 같은 비극에 한국이 닥칠 위기가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 당시 북괴의 군사적 준비와 정치적 선전은 구체적인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무초」의 보고에 의하면 북괴는 침공에 대비한 정치공세를 시작했던 것이 분명했다.
『평양방송은 6월7일부터 새로운 선전공세를 시작했다.
「애국제정만」과 조직이 ①8월5일부터 8일간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합동 최고입법기관」을 선출하고 ②이 기관의 제1회 회의를 서울에서 열며 ③남북지도자들은 평화통일의 방법과 총선을 위한 선거위의 설치를 논의할 것 등을 제안했다』 (6월9일 자비)
「무초」는 이 위장선전이 전쟁에 대비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옳게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틀전인 6월23일 주한미대사관과 국무성은 주한미군사고문단 4백72명을 다음해 1월까지 2백42명으로 줄일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1950년의 일지>
▲ 1월12일=「애치슨」미 국무장관,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밖이라고 선언
▲ 1월26일=한·미 상호방위원조 협정체결
▲ 2월14일=소·중공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조인(발효 4월11일)
▲ 3월 3일=「유엔」군사 감시위원단 파한 결정
▲ 4월13일=육군 총 참모장에 채병덕 소장임명
▲ 6월 7일=북괴 남북총선거제의
▲ 6월17일=「덜레스」미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내한(22일 이한)
▲ 6월25일=북괴남침·「유엔」안보리, 침략정지 요구
▲ 6월27일=수도, 대전으로 이등·「유엔」, 회원국에 한국지원 요구
▲ 6월28일=서울 함락. 한강인도교폭파
▲ 6월30일=「트루먼」대통령, 미 지상군을 한국에 투입
▲ 7월 5일=미지상군 선발부대, 오산에서 첫 전투
▲ 7월 7일=「유엔」,「유엔」사설치
▲ 9월 1일=북괴군, 낙동강 대공세전개
▲ 9월15일=「유엔」군, 인천 상륙
▲ 9월28일=서울수복
▲10월 7일=「유엔」군, 38선 돌파
▲10월12일=중공군선발부대 참전
▲10월15일=「트루먼」-「맥아더」,「웨이크.」도서 회담
▲10월19일=평양함락
▲10월26일=원산 상륙
▲11월 1일=중공군, 운산에서 미제1기 갑사 기습
▲11윌10일=「유엔」군, 압록강으로 진격·
▲11월25일=중공군, 청천강에서 미8군 공격,「유엔」군 철수개시
▲12월22일=「워커」장군 전사.「리지웨이」장군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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