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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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린 시절, 그는 목사나 전도사를 꿈꾸고 있었다. 돼지 한마리를 기르며 그 새끼를 쳐서 목사가 되는 공부를 하려고 했었다. 12남매 중 다섯번째로 태어난 부자집 딸로는 그야말로 이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벌써 10살이 되던 해에 그에겐 혼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녀는 한마디로 뿌리쳤다. 그보다는 공부하는 일이 그에겐 더 큰 관심사였다. 방문을 닫아 잠그고 단식을 했다. 학교에 보내달라는 투쟁(?)이었다.
그가 전주기전여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기도 했다. 그는 이 학교를 다니며, 「조국」「민족」「독립」이란 말들에 감동을 받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광산촌에 들어가 광부들의 자녀들을 위한 야학을 했던 것도 런 감동의 연장이었다. 3·1운동 때는 전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린 죄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일도 있었다.
그의 오빠는 이미 미국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그도 미국엘 갔다. 이승만 박사와 만난 것은 그가 도미하던 바로 그해(1923년)「샌프런시스코」에서였다. 독립운동가로 우러러보던 이 박사를 가까이에서 본 감회는 여간 깊은 감명이 아니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남가주대를 졸업하고는 즐곧 이 박사를 가까이에서 도왔다.
그는 생전에 결혼과 독신의 문제로 고민을 한일도 있었던 것 같다. 이승만 박사의 청혼을 받았었다는 풍문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젊은 시절엔 의사로부터. 중년에 접어들어서는 재미교포로부터 구혼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조국과 결혼했다』고 뿌리치곤 했다. 그 「조국」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45년10월, 이 박사가 환국하고 나서 그는 잠시 이 박사의 시중을 든 일이 있었다. 얼마를 같은 집에서 지낸 것이다.
그는 만년의 한 회고록에서 『주방의 냉전』을 술회한 일이 있었다. 뒤늦게 귀국한 이 박사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주방에서 맞닥뜨려 미묘한 냉전의 순간이 있었던가보다. 새삼 그가 이런 일화를 서슴없이 술회할 수 있던 것은 오히려 그의 담백한 성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설립한 오늘의 중앙대학교는 「청룡등천」의 꿈을 꾸고 나서 이루어진 소망이라고 한다. 중앙대 본관엔 정말 지금도 청룡상을 새워 놓았다. 현몽의 기념이리라.
바로 그 임영신 여사의 부음을 들으며 여걸 중에 한사람이 사라진 것은 서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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