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외국의 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금세기 들어 수도가 분리 또는 이전된 예는 여러 국가에서 볼 수 있다. 원래는 단일수도였으나 후에 수도의 기능이 두개의 도시에 양분된 것인데 그 과정은 나라마다 특수한 역사적·사회적인 배경이 있다.
현대의 수도이전은 천도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수도기능의 분화 현상이다. 사회발전단계가 낮았던 시대는 수도의 기능이 정치·행정에 국한돼 있었으나 근대에 들어와 상공업이 발전되면서 수도기능은 경제·사회적인 면으로 크게 확대됐다. 특히 금세기에 일반화된 도시화 현상으로 구도는 행정수도가 분리돼 나간 후에도 계속 발전하여 나갔나.
▲「브라질」=구도「리오데자네이로」(「1월의 강」이라는 뜻·인구 7백50만 명)는 이 나라의 광대한 영토에 비해 정치의 중심지가 되기에는 너무나 한쪽에 치우쳐 있어 56년「쿠비체크」대통령은 내지 개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새 수도의 건설·이전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시켜 추진했다.
「리오」서북쪽 9백km의 황무지에 미래 도시로 건설된「브라질리아」(인구 45만 명)는 거대한 비행기 모양을 따서 머리부분에는 삼권광장과 국회·대법원 건물을, 몸통 부분의 관청 가엔 연방정부의 각 행정부기구, 꼬리부분에는 기념광장, 양쪽날개부분에는 관리주거 「아파트」및 주택·외국공관·대학 등을 배치했다. 인공으로만 광대한「브라질리아」호반에 대통령관저인「새벽의 궁」이 자리잡고 있다.
구도는 상업·관광·문화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아직도 정치 도시의 기능을 잃지 않고 있다. 신도는 순수한 행정수도.
▲「오스트레일리아」=「새로운 연방수도의 필요성」이라는 이유로 1927년「멜버른」(2백20만명)에서「캔버라」(13만 명)로 수도를 옮겼다.
1901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 나라는 미국인「월터·그리핀」의 설계에 따라 1909년부터 「캔버라」에 행정수도 건설공사를 벌었다.
그러나 규모에 있어서는 구도「멜버른」의 10분의1도 안 된다. 정치는 비록「캔버라」로 이전했으나「멜버른」은 상업·경제의 중심지로 이 나라 제2의 도시.
▲「파키스탄」=47년 독립이후「카라치」(인구 4백만 명)가 수도였으나 지역적 여건이 나빠 57년 지금의「이슬라마바드」(인구 20만 명)로 천도했다. 「카라치」는 주위가 반 사막의 황무지인데다 용수의 부족으로 인구팽창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 이에 57년「쿠데타」로 집권한「아유브·칸」이「이슬람」문화의 중심지인 「이슬라마바드」에 새 수도를 건설하여 여기에 행정·문화 기능을 집결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리야드」(25만 명)에 왕궁과 정부청사가 집결돼 있으나 외무성만은 이 나라 제2의 도시이며 상업 중심지인「제다」(50만 명)항에 있다.
그것은 초대 국왕인「이븐·압둘·아지즈」가 수도에 외국인이 드나드는 것을 꺼렸기 때문. 각국 대사관도 외무성과 함께「제다」에 모여 있다. 그 대신「제다」동쪽 1백50km지점에 별궁이 있어 여름철 왕이 각료를 이끌고 이곳에 옮겨와 외국인을 맞는다.
▲서독=동독과 분리되고「베를린」이 동독에 둘러싸이자 1949년 연방정부수립과 함께 「본」을 통일될 때까지의「임시수도」로 선포하고 여기에 입법·행정기관을 설치했다.
당시 인구 10여만 명의 한적한 도시였던「본」은 그후 통일이 어려워지자 실질적인 수도로 정착되고 인구도 30만 명으로 늘었다.
▲「라오스」=75년 12월 2일 왕정폐지 이전에는「루앙프라방」(2만5천명)의 왕도와「비엔티앤」(15만 명)의 행정수도로 분리돼 있었다.
19세기초에 멸망한「비앤티앤」왕조의 고도였던「비엔티앤」은「프랑스」가 통치할 때 식민행정의 수도였다.
「라오스」의 공산화 이후 수도는「비엔티앤」으로 단일화됐다.
▲미국=독립되기 전 식민지 시대에는「뉴요크」가 정치·경제의 중심지이며 총독거주 도시로 발전했으나 독립 후 1790년「워싱턴」시가 연방정부수도로 결정됐다.
인구 7백90만 명의「뉴요크」는 미국 최대 도시로 경제·문화의 중심지며「유엔」본부가 들어서면서 세계 정치의 중심무대가 돼 있으나「워싱턴」(74만 명)은 순수한 행정·정치도시로 남아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