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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탓, 내 탓, 선장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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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요즘 또 하인리히 법칙이 언론에 자주 거론됩니다. 하인리히 법칙은 달리 1:29:300의 법칙으로 불립니다. 대형 사고 때면 등장하는 단골손님이기도 합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 직원 HW 하인리히가 입증한 법칙입니다. 그는 5000여 건의 실제 사고를 분석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형 사고 한 건이 일어나기 전 이와 관련 있는 소형 사고가 29건, 경미한 사고가 300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큰 재난이 나기 전에는 늘 어떤 신호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작은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김민주, 『하인리히 법칙』)

 10여 년 전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郞) 도쿄대 교수는 하인리히 법칙을 실패학에 접목했습니다. 그는 저서 『실패학의 권유』에서 작은 사고, 조그만 이상 징후를 놓치지 않아야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며 그것이 경영자의 책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실패학은 일본 열도를 강타했습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를 이 법칙에 빗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많은 국내 대기업들도 ‘하인리히 법칙’과 ‘하타무라 권유’를 임직원 교육에 활용했습니다. 그런데도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인간은 실패에서 배우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세월호라고 달랐겠습니까. 여객선 안전·관리·감독 유관 조합·협회장 자리를 수십 년간 독식해 온 해양수산부 낙하산 300건, 배에 누가 탔는지 확인도 안 한 무사안일 300건, 늦었다며 화물을 제대로 묶지도 않고 맹골수도를 아슬아슬 빠져나간 용감무쌍(?) 300건이 있었을 겁니다. 기념사진 국장, 컵라면 장관 같은 무개념·무책임 공무원도 그들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300건이 있었을 겁니다.

 어디 세월호뿐이겠습니까. 우리 사회엔 곳곳에 300건이 있습니다. 요 며칠 새 본 것만도 차고 넘칠 정도입니다.

 21일 출근길. 집 앞 커브길을 돌자마자 빨간 봉을 휘두르는 안전요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크” 급브레이크를 밟아가며 차선을 바꿔야 했습니다. 안전요원은 몸으로 공사 현장 표지판 역할을 한 겁니다. 이쯤 되면 사고를 막는 게 아니라 되레 유발하지만 않아도 천만다행입니다. 이런 공사 현장이 하루 이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미국 도로가 생각났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차로를 막는 ‘꼬깔콘’이 하나 둘 나타납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공사 현장이 안 보입니다. 2~3㎞를 달린 뒤에야 비로소 대형 트럭과 인부 서너 명이 나타납니다. “무슨 대단한 공사기에 이 호들갑인가” 힐끔 보면 별거 아닙니다. 대개 구멍 하나 메우는 정도의 사소한 공사입니다.

 22일 오후 3시 서소문로. 지하철 2호선 9번 출구 앞 인도에서 30분을 지켜봤습니다. 27대의 오토바이가 인도로 질주했습니다. 10대는 건널목을 건너갔는데, 모두 오토바이를 탄 채였습니다. 내려서 끌고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도를 걷는 보행자에게 경적을 울리거나 라이트를 번쩍거리는 오토바이도 있습니다. 누구 하나 항의는커녕 몸 피하기 급급합니다. 그만큼 시민들이 안전 불감증 불법 오토바이에 길들여졌다는 얘기겠지요.

 어디 안전뿐이겠습니까. 생활 속 어디에나 또 다른 300건이 있습니다. 새치기, 난폭 운전, 욕설 같은 겁니다. 여기엔 희생과 배려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이런 게 안전 불감증과 결합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게 바로 세월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제2의 세월호가 없으려면 이런 생활 속 300건부터 사라져야 합니다.

 마무리는 속담으로 하겠습니다. 아주 유명한 인디언 속담입니다. ‘사람 마음속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있다. 두 마리 늑대는 늘 싸운다. 이기는 쪽은 어딜까.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다.’ 늑대를 세월호 선장과 고(故) 박지영 승무원으로 바꿔봅니다. 나는 누구에게 먹이를 주고 있나. 선장 늑대인가, 승무원 늑대인가.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는 혹시 너무 오랫동안 선장 늑대에게만 먹이를 줘 온 것은 아닐까요.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