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북해의 선상 「아카데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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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독일의 「브레머하펜」항을 떠난 여객선은 북극으로 향하고 있다. 어떤 항해나 다 그렇듯이 이 선박에서도 선상 생활의 규칙이 엄격하기 때문에 제멋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 식사 때만 하더라도 조금만 늦으면 한사람의 「메뉴」 때문에 차질이 생긴다. 어떤 「유럽」 사람이 몇분 늦게 식탁에 이르렀는데 『죄송하다』고 따끔히 사과할 뿐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여객선에서는 좀더 멋지게 즐기기 위하여 마련한 행사가 많다. 다음 기항할 곳에 대하여 강의를 하는가하면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해설하는데 수준이 매우 높다.
이것은 곧 독일 문화가 얼마나 높은가를 실증해 주는 것의 하나다. 그리고 열람실에는 으레 여행 목적지에 관한 도서를 비롯하여 지도가 달려 있다.
「유럽」의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거의 기생 「파티」를 즐기는 따위의 저속한 여행을 하지 않고 인생을 좀더 살찌게 하기 위하여 학구적으로 연구하면서 여행을 한다. 저 유명한 문화 철학가 「슈펭글러」는 「유럽」 문명의 몰락을 부르짖었지만 여전히 문화를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동양에 대하여 곤댓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객들 중에는 부부가 많았는데 물론 여행을 즐기긴 하지만 구도자들처럼 보였다. 「셰익스피어」는 「지구는 무대, 인생은 배우』라고 말했지만 「세계는 도장, 사람은 수도자』라는 생각을 갖고 세계를 두루 다니는 이들 여행가들에게서 나는 적지 않이 큰 감명을 받았다.
큰 여객선에 단 몇 백명의 여객들은 여행 공동체가 아니라 문화 공동체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강의나 「슬라이드」에 만족치 않고 서로 진지하게 질문을 하여 의견 교환을 한다. 역시 이들의 지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 말하자면 이 선상 생활은 「예수」의 『올리브 산의 기도』와도 같은 경건한 「아카데미」를 이루는 것이었다. 나는 식사와 공적인 시간 외에는 도서실과 선실에서 비치된 책이며 「팸플릿」들을 뒤적였다.
여객선은 다음날도 계속 북해를 항해하고 있다. 이 북해는 세계 지도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매우 작으며 「유럽」지도에서도 대서양의 연해로서 길이 9백70km·너비 5백70km의 57만평방km이니 동해의 반쯤 되는 크기다.
그러나 이 북해는 영국을 서쪽으로 하여 동쪽은 「노르웨이」「덴마크」 독일 「네덜란드」「벨기에」 「프랑스」 등의 7개국으로 둘러싸여 있는 만큼 「유럽」 문화의 온상일 뿐 아니라 세계 문화의 요람이기도 하다. 또한 연안 지대는 세계에서 해상 교통이 가장 빈번한 곳이어서 수시로 선박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캄캄한 밤에 불을 환히 비추는 선박들을 보는 것은 버릴 수 없는 북해의 야경이다.
나는 지금 이 북해를 항해하면서 현실을 떠나 역사적인 회상을 해보았다.
어둠 속에서 역사적인 가지가지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북해는 「노드시」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옛 「로마」시대에는 「마레·게르마니쿰」 (게르만의 바다)라고 불렸는데 「로마」의 영웅 「시저」가 북부 「유럽」까지를 정복했을 때 붙였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생각하노라니 오만가지 환상이 떠올랐다.
이 북해는 유례가 없는 대륙붕으로서 놀랍게도 평균 심도가 불과 94m 밖에 안 되며 중앙의 천해는 20∼40m 대어로해는 50∼70m의 천해라는 자연 조건으로서 세계적인 대 어장이 되어 있다. 따라서 「트롤」 어업의 세계적인 중심지를 이루고 있어 연안에는 어항이 발달했는데 영국이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어획량도 가장 많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어항 「애버딘」에 가까운 해역에 이르니 해저 유수가 보이는가하면 시추를 하는 곳도 있었다. 이것은 영국의 새로운 기쁨일 것이다. 이 노대국은 석유를 머금고 다시 젊어 질 수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브레머하펜」을 떠난지 3일만에 새벽 갑판에 나가니 영국의 북쪽 「스코틀랜드」 연안이 짙은 안개 속에 마치 꿈나라와도 같이 아련히 보였다. 빙하 지형으로 이루어진 「피요르드」 (협만)가 많이 보이는가 하더니 여객선은 「브룸」만에 있는 「얼라풀」 항구에 기항했다. 「스코틀랜드」 북서쪽에 있는 조용한 어항인데 전통 사회의 기품이 있고 영국인이 좋아하는 잔디가 펼쳐지는 전원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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