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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회사 살린 묘약, 바로 무한책임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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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새벽기도에서 경영의 지혜를 얻는다는 심재수 청호컴넷 사장은 “신입사원 뽑을 때 능력이나 스펙을 1순위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건 자세”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6년째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다. 주위에선 “직업이 CEO냐”고 물을 정도다. 경영을 따로 배운 적도 없다. 오히려 엔지니어 출신이다. 다니던 회사가 외환위기 때 부도가 났다. 그 와중에 회사를 인수한 글로벌 기업에서 그를 CEO로 찍었다. 이유는 회사가 무너질 때 그가 보여줬던 ‘무한책임’의 자세 덕분이었다.

 주인공은 심재수(58) 청호컴넷 대표. 국내 최초로 한글 모아쓰기 시스템과 한글·영문·한자 겸용 컴퓨터 단말기 및 프린터기를 개발한 엔지니어다. 그가 한글 모아쓰기 시스템을 개발하기 전에는 컴퓨터에서 자음과 모음을 두드리면 알파벳처럼 옆으로만 나란히 찍혔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퇴근해서 집에 오면 자정이 넘었다. 자다가 아이디어가 번뜩 떠오르기도 했다. 그럼 뜬눈으로 통금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새벽 4시쯤 미친놈처럼 달려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갔다. 그 아이디어로 소프트웨어의 문제가 풀릴 때는 혼자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그건 열정이었다. 그는 은행에서 사용하는 현금·통장 겸용 자동지급기를 최초로 개발했다. 일일이 은행을 찾아다니며 제품을 설명하고 설치했다. 승승장구하던 회사가 ‘IMF 위기’ 때 고꾸라졌다. 직원에 불과하던 그는 무한책임을 지겠다고 자처했다. “같이 일하던 동료는 다들 파업을 하자고 했다. 그런 그들을 설득했다. 여기서 파업하면 한 줌의 희망마저 사라진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동료와 함께 은행을 돌면서 현금자동지급기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를 실시했다. 그를 믿고 지급기 설치를 결정한 은행 직원들이 난처한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쉽진 않았다. 몇 달째 월급도 나오지 않았다. “차비도 안 나온다. 망한 회사에서 무슨 애프터서비스냐”는 불만도 많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집으로 ‘경매절차통지서’도 날아왔다. 회사를 위해 보증을 선 게 화근이었다.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집 근처 교회로 새벽기도도 다녔다.

 벼랑 끝에서 희소식이 날아왔다. 사업파트너였던 후지쓰 그룹에서 부도난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했다. 직원들끼리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글로벌 기업인 후지쓰는 부도난 상황에서 직원들이 힘을 모아 고객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점에 감동했다고 했다.

 CEO 자리에 누가 올지가 관심사였다. 후지쓰 그룹은 그에게 CEO를 맡으라고 했다. 깜짝 놀란 그는 거절했다. “엔지니어 출신에다 경영 경험도 없다”며 고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후지쓰 측은 “당신이 CEO를 안 맡으면 다른 대안이 없다”며 회사가 어려울 때 그가 보여줬던 책임감을 높이 평가했다.

 회사 경영은 아는 게 없었다. 그는 묵상에서 답을 구했다. “차분히 성경책을 들여다 봤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능력이 뛰어난 게 아니더라.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더라.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식으로 새벽기도에서 얻은 깨침을 하나씩 회사 경영에 대입했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그는 스펙을 1순위에 놓지 않는다. “요즘 다들 ‘스펙이냐, 스토리냐’를 따진다. 나는 능력이나 스토리보다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능력은 훈련을 통해 키우면 된다. 자세가 잘못돼 있으면 커다란 능력도 엉뚱한 쪽으로 쓰게 된다.”

 심 사장의 새벽기도는 5200일이 넘었다. 햇수로 16년째다. 묵상에서 얻은 깨달음을 기록한 노트가 50권이 넘는다. 최근에는 자신의 경영스토리를 담은 저서 『네 날을 길게 하리라』(샘솟는기쁨)를 출간했다. 주위에서 ‘장수 CEO의 비결’을 물으면 그의 답은 한결같다. “삶은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가 가장 중요하더라.”

글=백성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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