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북극해의 백의귀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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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여객기는 드디어 이른 아침에「덴마크」의「코펜하겐」에 내렸다. 한국을 떠난 지 17시간만에 정 반대쪽의「유럽」에 온 것이다. 죽음의 세계와도 같은 북극의 하늘을 날다가 짐짓 이 나라에 내리니 북구의「멜랑콜리」가 휩싼다. 북구의 도시들은 하나같이 육중한 분위기지만「코펜하겐」은 유독 그런 인상을 준다.
이번 여섯 번째의 여행목적지는 북극권이므로「덴마크」는 여로관계로 스쳐 가는 곳이어서 잠시 이 도시에 머무르고는 곧 북극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독일로 향했다.「뮌헨」에서 나의 극친한 여우「케벨」여사의 도움으로「그린란드」로 가는 승선절차를 끝내고는 북부독일의「브레멘」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날은 마치 토요일이어서 시내는 온통 즐거운 시민들의 웃음소리와 함께「쇼핑」으로 수선거리고 있었다. 모두 행복해 보였다.
강인한「게르만」적인 성격에서 온화한 비둘기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놀라 왔다. 경제적인 부 강과 안정된 사회가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정말 부러운 이 나라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오후는「베제르」강을 따라 하구에 있는「브레머하펜」항에 내려가니 북해 쪽의 목가적인 구릉지가 보이는가 하더니 품위 있게 가꾸어진 낙엽수 잡림이며 화가「몬드리안」의 기하학적인 추상파 그림과도 같은 규칙적인 연맥·나맥 들의 밭이 펼쳐졌다. 동화 속에 나오는 듯한 깨끗하고도 아담한 1, 2층의 시골집들도 띄엄띄엄 보였다. 이 시골풍경이 어찌나 아름다운지「베토벤」의 전원교향곡 속에 나오는 전원 풍경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런 시골도 교통시설이 매우 잘되어 있어 도시처럼 불편을 주지 않는다.
북극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하여 열차로「브레머하펜」항에 이르니 대형선박들이 닻을 내리고 있는데 새로운 광경은 큰 나무궤짝으로 꾸리고 철저히 잠근「컨테이너」양식의 선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항구는 북해에서 불과 26「킬로」올라온「베제르」강 동안저지대에 있는 이른바 하 항이다.
열차가 부두에 닿았는데 바로 앞을 막은 것은 백색의 성과도 같은 여객선「유로마」의 커다란 몸뚱이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에스컬레이터」로 4, 5층 건물의 높이로 올라가서 이 여객선에 타기로 되어 있는데 정말 기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통기관의 모습이다.
이 여객선은「대 북극권 여행」에 봉사하는 선박인데「그린란드」의 빙원이나 빙하나 빙산을 흉내냈는지 모르나 하얗게 칠해져 있어「북극해의 흰 옷 입은 귀부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배는 2만여t으로 선원 2백 92명에다 승객 5백 62명을 수용하는 꽤 큰 여객선이다. 승객들은 거의 독일어·영어·불어를 쓰는 각 국 사람들이지만 한국어를 쓰는 국민은 나 혼자였다.
더구나 그 많은 승객가운데는 세계 도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본인도 없었으며 동양인이라고는 오직 나 혼자 뿐이었다. 까만 머리, 까만 눈동자, 그리고 누르스름한 얼굴을 지닌 나는 많은 승객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으며 동양인이라고는 매우 귀한지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건네 왔다.
이 배는 예정대로 하오7시 정각에 북극으로 향하여 떠나는데 취주악대가 연주를 하는 가운데 5색 무늬 아롱진 환송 인들의「테이프」가 휘날렸다. 나는 지금 어렸을 때부터 줄곧 꿈꾸어 온 북극권 항해에 들어선 것이다. 배는 천천히「베제르」강을 내려 북해로 들어서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70대의「막스」씨라는 서독노인과 함께 선실에 들었는데 책상에는 선장으로부터의 승선환영「메시지」를 비롯하여 승객 명부에 선상생활의 규칙서 등 이 있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선상행사가 베풀어지는가 하면 무전으로 받아 발간하는 선상「뉴스」가 배부된다.
북극으로 향하는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다음 날 오전에는 선상피난훈련이 있었다. 비상기적이 울리면 구명 동을 입고 상 갑판의 구조선까지 나가며 여러 가지 지시를 받아야 한다. 나는 동양을 대표하는 격이 되어서「유럽」사람들에 지지 않을세라 모범을 보이느라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 훈련은 국제친선을 꾀하는 가장 좋은 기회로서 나의 한국적인 익살도 많은 승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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