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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가져다 쓰시죠, 이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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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오픈소스 하드웨어인 라즈베리 파이①에 5인치 스크린, 터치패드, 키보드 등을 장착해② 만든 초소형 노트북 파이투고③. 제작비용은 390달러다.

요즘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 중 하나는 신용카드 크기만 한 초소형 PC 보드인 ‘라즈베리 파이(Rasberry Pi)’다. 가격은 35달러에 불과하지만 모니터와 USB 키보드를 연결하면 어엿한 PC로 사용할 수 있다. 출시 1년여 만에 전 세계적으로 200만 대 넘게 팔렸다. 케이스 없이 보드 형태로 판매되고 있는 이 제품의 매력은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는 점.

 PC 전문가 나단 모건은 라즈베리 파이와 5인치 스크린·터치패드·키보드 등을 활용한 ‘파이투고’라는 노트북을 만들고 도면을 공개했다. 영국 사우샘프턴대의 사이먼 콕스 교수는 6살짜리 아들과 함께 레고 블록과 라즈베리 파이 64개를 연결해 72테라플롭스(초당 1조 번의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는 계산 능력)의 성능을 내는 수퍼컴퓨터를 만들고, 그 과정을 문서로 정리했다. 몇몇 주변장치만 있으면 공개된 도면을 보고 누구나 새로운 기능의 PC를 조립할 수 있는 셈이다.

 첨단 IT기기도 모든 설계와 디자인을 스스로 만드는 DIY(Do It Yourself·본인이 직접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제품)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제품을 구성하는 부품이나 회로도 등을 공개하고 이를 통해 원하는 기능의 IT기기를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오픈소스 하드웨어’ 플랫폼 덕분이다.

 흔히 오픈소스라 하면 리눅스 같은 무료 공개 소프트웨어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오픈소스 하드웨어는 바로 소프트웨어에서의 방식을 하드웨어 제작에 적용한 것이다. 제품의 설계도를 인터넷에 통째로 공개해 다수의 기술자가 의견을 나눈다. 기능은 더 뛰어나고, 가격은 더 저렴한 제품을 개발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사물인터넷 기반의 오픈소스 하드웨어인 아두이노(Arduino)가 대표적인 사례다. 2005년 이탈리아의 미디어아트 학교에서 교육용 플랫폼으로 제작됐지만 아두이노를 이용해 손쉽게 전자 제품의 기능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다양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미디어 지원, 무선 통신 등의 기능이 추가되면서 사용 분야가 점차 넓어지고 있다.

아두이노(사진 왼쪽)에 습도센서, 무선 전송장치 등을 결합해 만든 보태니컬즈(사진 오른쪽). 토양의 습도 등을 측정해 식물에 물을 주어야 할 때를 스마트폰으로 알려준다. [사진 KT경제경영연구소]

 아두이노는 기판의 회로도와 기능 등이 공개돼 있기 때문에 이용자가 직접 아두이노를 조립할 수 있고, 아두이노의 기능을 활용해 다른 전자제품에 새로운 능력을 부여할 수도 있다. 특히 각종 센서의 조작이 쉬워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제품을 만드는 데 유용하다. 식물에 물이 부족하면 자동으로 주인에게 트윗을 날리는 장치, QR코드를 비추면 자동으로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칵테일 기계 등이 그 예다.

 21일 IT업계에 따르면 이뿐 아니라 트랙터, 콘크리트 혼합기, 윈드 터빈, 수력 모터, 빵 굽는 오븐, 3D프린터 등의 하드웨어가 오픈소스를 통해 개발되고 있다. 캐나다의 메이커플레인이라는 단체는 오픈소스 방식으로 1만5000달러 정도의 저가 비행기 제작을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TG삼보가 디스플레이 및 입출력 장치, 초소형 컴퓨터 본체를 블록놀이 하듯 조합해 다양한 형태로 쓸 수 있는 조립형(모듈형) PC를 개발하는 등 비슷한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구글이 모듈형 스마트폰 ‘아라(Ara)’ 시제품을 공개하면서 앞으로 더욱 신선한 오픈소스 하드웨어가 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엔도스켈레톤’이라 불리는 프레임에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디스플레이, 카메라, 키보드 등 부품들이 들어간다. 빈 자리가 있으면 보조 배터리나 고성능 플래시, 맥박이나 산소 측정기 등 색다른 부품도 넣을 수 있다. 현재는 새로 등장한 기능을 쓰려면 스마트폰을 새로 사야 하지만 아라에선 원하는 부품만 바꾸면 된다. 스마트폰 이용자들은 저마다 바라는 기능이 다르기 마련이다. 소프트웨어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애플리케이션이었다면, 하드웨어적으로 접근한 게 바로 아라다.

 약간 다른 형태의 오픈 하드웨어 플랫폼도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은 최근 소셜 제품 개발 플랫폼 업체 쿼키와 협약을 맺고 달걀의 신선도를 알려 주는 에그 마인더(Egg Minder)를 공개했다. 쿼키는 GE가 가지고 있는 광학·단열코팅·컴퓨터통신 기술 등 관련 특허를 이용해 더욱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GE가 특허 기술을 제공하고 쿼키의 개발자들은 이를 활용해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만드는 점에서 오픈소스 하드웨어 플랫폼의 특징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오픈소스 하드웨어가 인기를 끌면서 이를 비즈니스에 활용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레고는 자사의 로봇 장난감과 아두이노를 활용한 로봇 교육 프로그램을 북미 지역에서 운영하고 있다. 포드도 아두이노를 이용해 차량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오픈XC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런 오픈소스 하드웨어 플랫폼이 확산되면 IT기기는 더욱 이용자 중심적인 제품으로 변모하게 된다. 기존에는 제조사의 이윤을 극대화시킨 IT기기가 시장에 판매됐다면, 오픈소스 하드웨어에서는 외형·기능·가격 등에서 소비자가 능동적인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개방과 협력을 강조하는 특성 덕분에 기술 개선 및 혁신의 속도가 빨라져 시장은 더욱 활기를 띤다.

 지금처럼 소수의 대형 IT회사가 생산을 독점하고 부품 납품업체를 거느리는 게 아니라, 납품업체가 개별 이용자들과 직접 접촉해 판매할 수 있게 된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담기 쉽고, 가격도 저렴해지면서 새로운 IT생태계가 형성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3D프린터의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부품 조달이 쉬워졌고,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등을 통해 투자자를 유치하는 것도 수월해져 오픈소스 하드웨어를 통한 IT기기 개발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KT경제경영연구소 이보경 연구원은 “앞으로 기술 진입 장벽이 낮아지면서 벤처·중소기업에 더 많은 수익 창출 기회가 생길 것”이라며 “대기업도 개발비용 절감과 서비스 영역 확대를 위해 오픈소스 하드웨어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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