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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만들어만 놓고 … 현장 컨트롤타워 지정 안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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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세월호 침몰사고 닷새째인 20일 밤 경기도 안산 초지동 화랑유원지에서 학생·시민 등 1200여 명이 모여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참석자들은 “언니·오빠들 살아 돌아오세요. 기다릴게요” 등의 글을 적은 종이를 들고 나와 자리를 지켰다. [김성룡 기자]

정부가 재난 사고가 발생할 경우 구조작업을 일사불란하게 할 수 있도록 지휘·발표를 일원화해 컨트롤타워를 지정하도록 매뉴얼을 만들었지만 세월호 침몰 과정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매뉴얼 작성 작업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20일 “세월호 사건의 가장 큰 맹점은 현장의 지휘 책임을 맡은 컨트롤타워가 제대로 지정되지 않아 중구난방이 됐다는 점”이라며 “정부 매뉴얼에는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컨트롤타워로 지정하게 돼 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지난해 정부가 갖고 있는 매뉴얼을 업그레이드 했고, 바뀐 매뉴얼의 핵심 방향은 사고 지휘와 발표를 일원화하는 컨트롤타워를 지정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에는 ▶국가안보 관련 매뉴얼 14개 ▶재난에 관한 매뉴얼 15개 등 29개의 위기대응 매뉴얼이 마련돼 있다. 매뉴얼에는 각 부처가 위기상황 시 대응하는 방안이 적혀 있고, 각 부처뿐 아니라 청와대 국가안보실 산하의 위기관리센터에서도 이 매뉴얼을 관리하고 있다.

 정부는 2012년 9월 구미 불산가스 누출사고를 겪으면서 대형 재난 사고 발생 시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초동단계에서 실질적인 컨트롤타워를 지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결론 냈다. 상황을 가장 잘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에게 상황 판단과 구조를 위한 인적·물적 지원 등에 대한 전권을 줘서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는 게 핵심이란 얘기다.

 이런 판단을 토대로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는 지난해 위기대응 매뉴얼을 손질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아무리 상세하고 좋은 매뉴얼이라도 담당자들이 내용을 잘 모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담당자들이 매뉴얼을 충분히 숙지해서 실제 위기상황 시에 매뉴얼대로 움직이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과정에선 이렇게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고 당일 전남소방본부에 조난신고가 접수된 건 오전 8시52분이었다. 이어 지방 출장을 떠났던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이 사건 발생에 대해 보고를 받은 시간은 오전 9시25분이었다. 6분 뒤인 9시31분, 안행부 관계자가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장(신인호 위기관리비서관)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상황을 알렸다. 강 장관의 지시에 따라 안행부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가 가동되기 시작한 건 오전 9시45분이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이르면 오전 9시31분~9시45분 사이에 보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고접수로부터 중대본이 움직이기까지는 53분이 걸렸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김 실장의 보고 내용과 박 대통령의 지시 내용을 파악해 사건 관련 언론 브리핑을 한 시각은 오전 10시30분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매뉴얼대로라면 중대본이 구성되고, 안행부 장관이 사고 현장의 책임자를 지정해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겼어야 한다. 하지만 컨트롤타워가 지정되지 않다 보니 일사불란한 구조가 이뤄지지 못해 우왕좌왕하게 됐고, 발표도 혼선을 빚었다. 당장 사고 당일인 16일 구조 인원 집계가 368명(오후 2시)→164명(오후 4시 30분)→175명(오후 11시)으로 수차례 번복되는 혼선이 빚어졌다. 18일 구조대의 선체 진입 여부를 놓고도 중대본은 오전 10시5분에 “진입 통로를 확보했다”고 했다가 오후 3시27분엔 “실패했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서해 해경 측은 “여객선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 공기를 주입하고 있다”고 상급 지휘부인 중대본의 발표를 부인하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이전 정부에서 재난구조작업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해경은 현장에 있고, 안행부 장관과 차관은 중대본이 있는 서울에 있다 보니 이런 혼란이 생겼다”며 “해경처럼 현장을 통제할 수 있는 쪽에서 컨트롤타워를 맡아서, 그 사람을 통해 일원화시켰으면 그런 착오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정홍원 국무총리의 지시로 세월호의 구조·수색 활동 발표 주체를 ‘범부처사고대책본부’(대책본부, 본부장 해양수산부 장관)로 일원화한 건 사고 발생 이후 59시간이 지난 18일 오후 8시쯤이었다. 그제야 매뉴얼대로 조치가 이뤄졌지만 이미 구조작업에 난항을 겪으면서 국민의 비판 여론이 들끓고 있을 때였다.

 대책본부가 꾸려지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당초 총리실은 17일 정 총리가 본부장을 맡는 범정부대책본부를 꾸리려 했다가 이튿날 이를 번복했다. “기구를 안 만들어도 총리가 사고 수습을 지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다”(총리실 관계자)는 이유였다.

 현재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에는 2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중 절반 정도는 군 출신이고, 안행부 파견 인력은 1명이다. 위기관리센터를 포함해 청와대 국가안보실의 비서관급 이상 직위에 재난 전문가가 없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글=허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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