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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법인 한마디에 상장폐지 … 소액투자자 날벼락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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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호 21면

“빚이 1원도 없고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만 30억원에, 60억원어치 수주까지 받아놓은 회사가 상장 폐지라니요.”

코스닥의 ‘저승사자’ 지정감사인 제도 논란

코스닥 상장회사 아라온테크 홍진규 대표는 한숨만 쉬었다. 20년 동안 스마트폰 등의 터치스크린 패널 제조에 한 우물을 파온 홍 대표는 2012년 코스닥 상장사였던 아라온테크(당시 뉴로테크)를 인수했다. 사업을 키우기 위해선 상장사가 유리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막상 장부를 들여다 보니 지엔티파마란 계열사의 부실이 심각했다.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 고민 끝에 홍 대표는 92%였던 지분을 ‘50%+1주’를 남기고 팔되 경영권을 얹어주는 매각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부실을 털어내려던 이 고육책이 두고두고 화근이 됐다. 부실을 한꺼번에 정리하면서 실적이 악화하는 바람에 2013년 관리종목으로 떨어져버린 것.

그러자 금융감독원은 기존 아라온테크의 감사를 맡았던 안진회계법인 대신 성도회계법인을 감사인으로 지정했다. 1989년부터 도입된 지정감사인제도에 따른 조치였다. 금감원 장석일 회계제도팀장은 “기업과 회계법인 간에 관계가 ‘끈끈해’지면 감사의 엄정성이 떨어질 수 있어 관리종목에 편입된 상장사엔 금감원이 지정감사인을 배정한다”고 설명했다. 한데 아라온테크는 지난해 성도 측으로부터 뜻밖의 통보를 받았다. 이미 매각한 지엔티파마를 놓고 “자회사인데 왜 연결재무제표에 포함시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팔았다고는 하지만 지분율이 여전히 ‘50%+1주’ 이상이면서 실질지배력이 있으면 자회사로 봐야 한다는 논리였다.

아라온테크는 지분 매각 당시 ‘경영권도 함께 넘긴다’는 계약서를 제시했다. 게다가 2013년 성도가 감사인으로 지정되기 전 감사인이었던 안진은 2011년과 2012년 이미 사실상 분리된 지엔티파마를 자회사로 보지 않아도 된다고 판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성도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라온테크가 계속 항의하자 성도는 “안진에 가서 재감사를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아라온테크의 재감사 요청을 받은 안진은 “국제기준에 따라 적법하게 감사했으니 재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안진은 지난해 매출액 2600억원으로 삼일에 이어 회계법인 ‘빅2’다. 매출 140억원대로 업계 13위인 성도의 재감사 요구를 받아줄 리 없었다.

다급해진 아라온테크는 금감원에 손을 내밀었다. “양쪽 논리 중 맞는 쪽을 따를 테니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금감원은 “감사가 진행 중인 사안에 끼어들면 회계사의 독립적 판단에 영향을 준다”며 뒤로 빠졌다. 홍 대표는 “회계법인 간의 자존심 대결에 새우등 터진 격”이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홍 대표는 지난달 24일 성도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연결재무제표에서 지엔티마를 누락한 것에 더해 “18억5700만원의 당기 순손실을 본 만큼 기업을 계속 경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기말 감사보고서에 대해 ‘의견거절’ 판정을 내렸다.

감사보고서에 대한 회계법인의 평가는 네 가지다. ‘적정’이나 ‘한정’을 받으면 상장사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코스닥 상장사가 ‘부적정’이나 ‘의견거절’을 받으면 상장이 폐지된다. 상반기 감사보고서에서 연결재무제표 문제로 ‘부적정’ 판정에 이어 또 한번 ‘의견거절’을 받은 아라온테크로선 사실상 사형을 구형당한 셈이다. 성도 측은 “회계감사는 회계사의 고유권한이므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며 “한국회계기준(K-GAPP)에 따라 적법하게 감사가 이뤄졌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밝혔다.

작년 22개사 회계감사에 의해 퇴출
아라온테크는 반발하고 있다. 국내 회계기준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이 전년대비 84.4% 줄어든 38억원에 머물렀지만 국제회계기준(K-IFRS)을 적용하면 당기순이익 10억원으로 흑자전환 했다는 것이다. 홍 대표는 “순자산 90억원, 부채비율 0%, 현금성 예금 자산이 30억원이나 있다”며 “이미 60억원어치를 수주해 일을 하고 있는 기업의 존속이 불확실하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라온테크 관계자는 “성도는 지난해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관련 소속 회계사 두 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며 “상반기 감사보고서에서 ‘부적정’ 판정을 내린 게 부실 감사로 밝혀질까 우려해 의도적으로 ‘의견거절’을 낸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아라온테크의 운명은 22일 열리는 거래소 상장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회계법인의 감사 결과를 존중하는 최근 분위기상 상장폐지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4600여 명의 주주가 가진 2250만 주, 70여억어치 주식은 비상장주식이 돼 투자자 피해가 우려된다. 지난해 상장 폐지된 기업(47개사) 가운데 46.8%(22개사)가 결산 과정에서 퇴출됐다. 이 중 ‘의견거절’ 등 회계감사 의견 비적정 사유로 상장 폐지된 기업은 60.2%(15개사)에 달한다. 금감원이 감리로 적발한 부실감사 적발 비율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09년 13%에서 지난해엔 50%를 넘어섰다. 감리 대상이 된 회계감사 가운데 둘 중 하나는 부실감사로 드러난 셈이다.

업계에선 지정감사인 제도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지정감사인은 통제 받지 않는 권력”이라며 “회계법인 말 한마디에 장래성 있는 기업마저 퇴출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벌점 등을 기준으로 지정감사인에 참여하는 회계법인의 자격 요건을 높이고 복수 감사인 지정제를 도입해 회계법인끼리 서로 견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코스닥시장은 1996년 미국의 나스닥을 모델로 출범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났지만 지수는 500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시가총액은 역대 최고액의 2800분의 1에 머무는 등 ‘코스피 2부리그’란 지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부도 지난 15일 코스닥시장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기술력만 있어도 상장 가능’ ‘상장 위한 자기자본 기준을 15억원에서 10억원으로 완화’ ‘정보기술(IT)·바이오에 한정된 상장특례 업종 제한 폐지’ 등이 망라됐다. 한마디로 기술 있는 기업은 상장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계법인 한마디에 하루아침에 상장사의 운명이 뒤바뀌는 허점이 남아 있는 한 코스닥시장 활성화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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