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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엘레지의 여왕, 시청률의 제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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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미자 노래 55주년 콘서트’ 리셉션에 차기 서울시장 후보들이 등장했다. 이런 호재를 놓칠 리 없다. 저마다 팬임을 자처하고 서민적 풍모도 과시했다. ‘엘레지의 여왕’은 형평성을 잃지 않았다. 웃음을 머금고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라고 치켜세웠다. 무대만큼 ‘감동적’이진 않았고 그냥 ‘인간적’이었다.

 점잖던 분들이 갑자기 ‘인간적’으로 변신한다. (‘인격적’으로가 아니다.) 말의 속도가 빨라지고 음역도 높아진다. 음성이 아니라 언성에 가깝다. 평소에 안 하던 말도 한다. ‘보는’ 사람도 어색한데 ‘하는’ 사람은 오죽하랴. 선거철 증후군. 나는 이것도 세시풍속이라 부른다. 알록달록한 옷도 입어보고 처박혀 있던 제기도 꺼내 차는 것처럼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목표는 단 하나. 당선 가능성을 높이려는 의도다.

 방송사는 그 가능성을 매일 중계한다. 그들은 경쟁에 익숙하다. 전통적인 4강(K1, K2, M, S)이 있고 군소후보들도 즐비하다. 아침마다 점수가 나오고 등수가 매겨진다. 유권자(시청자)는 뽑을 만한 후보(볼 만한 프로)가 없으면 기권하면(안 보면) 된다. 그러고 보니 PD들은 누가 뭐래도 감정노동자들이다. 평생 겪는 감정이 일희일비(一喜一悲)니까. 일등 하면 날 것 같고 꼴등 하면 숨고 싶고 계속되면 죽고 싶고.

 드라마가 시대의 온도와 습도를 짚어준다면 코미디는 세상의 속도와 각도를 일러준다. 코미디 최강자인 ‘개그콘서트’는 웃음제조 앞에서 ‘자폭’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기코너인 ‘시청률의 제왕’은 개그맨 박성광의 자문자답으로 시작한다. “내가 누구? 내가 바로 시청률의 제왕 박 대표야.” 하지만 누구도 그를 제왕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시청률의 노예다.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감독과 배우를 압박하며 막장으로 가라고 노골적으로 지시한다.

 ‘노예 12년’이라는 제목은 엉뚱하게도 초·중·고 12년의 경쟁심 교육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의 삶 전체를 조망하게 만든다. 노예의 길은 두 갈래다. ‘나는 노예가 아니다’고 다짐하며 끈질기게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자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목화를 열심히 따고 심지어 ‘잠자리’ 시중도 서슴지 않는 노예. 먹고살게 해주면 됐지 자유는 무슨 자유?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다 마침내 운명의 노예가 된다. 미래설계는 내동댕이친 채 유권자, 시청자들이 선택하는 손가락만 바라보며 오늘을 견디는 한 ‘노예 12년’이 아니라 ‘노예 55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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