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문제의 지게(상)|만연하는 불신풍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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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현대를 흔히 「불신시대」라고 한다. 불신풍조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도 요즘 우리 사회에는 이 불신풍조가 각 분야의 구석구석에까지 파고들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남을 믿고 무엇을 하다가는 손해보기 일쑤이며 만만이 속아넘어가기 마련이라 한다.
남을 믿고, 착하고 바르게 살려는 사람은 때때로 무능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고, 자칫하면 놀림감이 되거나 바보 취급당하기조차 한다.
진짜 못지 않게 가짜가 버젓이 행세를 하며 어느 일치고 가짜가 한몫 끼지 않는 경우는 드물 지경이다.
부정·유해한 갖가지 가짜 식품, 함량 미달의 가짜 약품, 살갗을 상하게 하는 엉터리 화장품, 돌팔이 가짜 의사에 가짜 진단회, 가짜 세무원을 공갈친 가짜 기관원, 가짜 사무실에 가짜광고를 내서 선량한 사람들을 등치는 가짜 이민·취업알선 「브로커」들…. 만화경 같은 세태가 아닌가.
교묘히 남을 속이고, 사기를 치고, 굳게 다진 약속을 어기며, 신의를 버리고 철새처럼 국물을 찾아 입장을 바꾸고, 칠면조처럼 배신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뿐더러 이를 부도덕하거나 심지어 부끄러운 일로 느끼지 않는 듯하다.
사람들의 양심이 마비되고 인간정신이 극도로 황폐해 졌으며, 가치기준이 전도되고 사회도의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진 슬픈 현실을 빚고 있다.
물론 이같은 인간성 상실·불신풍조·도덕부재 현상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시대부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왕조 때부터 있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6·25를 계기로 이같은 현상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의 사고방식·생활방식을 뒤죽박죽으로 바꿔버렸다 할 전쟁의 충격과 영향, 피눈물나는 생활고와 치열한 생존경쟁 때문이라 하겠다.
체면과 예의 염치를 중히 여기고 신의를 철저히 지키고선 냉혹·비정한 상황아래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고, 먹고살기가 무척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누적 축적된 병폐현상이 고질화했다고 볼 수 있을듯하다.
불신풍조의 만연 속에서 사람들은 남을 못 믿고 의심하게 되며 본능적으로 남을 경계하게 된다. 남의 진심도 호의도 액면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며, 일단 감춰진 저의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든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상황 아래서 사람들은 자연히 자위책을 강구하게 되고 나아가 공격적이기도 한다. 남을 신뢰하지 못한 채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드디어 남을 욕하고 해치는 일조차 의식·무의식간에 하게끔 되고 만다.
남을 시기·질투하고 동료와 이웃을 의심하고·적대감을 품게되며 마침내 가장 교묘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모략·중상하기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무고·밀고·모함·투서 등의 음해풍조가 요즘 기승을 부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특히 서공쇄신 작업과 부조리제거 운동이 본격화되면서부터 이같은 야비하기 그지없는 음해행위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정계·관계·경제계·문화계 할 것 없이 투서의 악습이 성행하고 음해의 독기가 서려 있다고 한다.
정계의 경우, 정치이념을 같이한다는 당 동지끼리 걸핏하면 모략하고 경쟁상대나 경쟁파벌끼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 도의심을 망각한 채 이른바 흑색선전을 하고 모함을 한다는 것이다. 해방이후, 그리고 자유당 때도 흔히 있었던 미운자나, 「라이벌」에 대해 「공산당」이란 낙인을 찍어 몰아붙였던 일, 그리고 5·16 이후 유행한 소위 「사꾸라」라는 딱지를 붙여 상대자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던 습성이 지금도 완전히 가셨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관계 역시 자신의 비위를 은폐하고나 승진을 꾀하기 위해 동료나 상사를 무고 하는 몰지각한 행위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런 투서·무고 행위로 말미암아 갖가지 부작용이 생겨났고, 급기야는 역대 검찰총장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규하 국무총리까지 『모든 무기명 투서는 이를 묵살하라』는 지시까지 내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사태는 악화됐던 것이다.
경제계 또한 고분고분 말을 들어주지 않는 관계 공무원이나 경쟁업체에 대해 뇌물을 받았느니, 상납을 했느니, 탈세를 했느니 하고 있는 일, 없는 일을 미주알 고주알 진정의 형식을 빌어 무고 한다고 한다. 또 자기의 부당 이득을 노려 사실무근한 일을 사실인양 꾸미고 풍문과 낭설을 어디까지나 진실인양 각색하여 투서한다는 것이다.
문화계도 예외는 아니다. 문화단체의 책임자 선출 등을 둘러싼 문화인답지 않은 악의 찬 중상과 무고가 수없이 있었던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동료와 상사, 동지와 「라이벌」경쟁업체를 무고 하는 행위는 부도덕한 행위요, 반사회적, 범죄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불신풍조는 음해풍조를 낳고, 음해풍조는 다시 불신풍조를 조장하여 사회도의를 더욱 타락시키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면서 우리 사회를 근저로부터 부식·훼손하는 무서운 작용을 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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