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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내 자식이라도 거들먹대면 두들겨 패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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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호 29면

장쉐량(앞줄 왼쪽 셋째)을 호위한 동북강무당 출신 장교들. 1936년 겨울, 장쉐량은 이들과 함께 시안(西安)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2차 국공연합과 항일전쟁을 이끌어냈다. [사진 김명호]

중국인들의 장쭤린(張作霖·장작림)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뭐든지 솔직하고 매력이 넘쳤다. 부인과 자녀, 부하들 교육에 가장 성공한 지도자였다”는 기록이 많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69>

1918년, 동북 3성(만주)을 장악한 장쭤린은 정규군 양성을 서둘렀다. 사병들은 긁어모으기 쉬웠지만 장교가 부족했다. 신해혁명으로 폐교된 ‘동3성 강무당’ 자리에 ‘동북강무당’ 간판을 내걸고 생도들을 모집했다. “완벽한 시설을 마련하고, 교관들도 최일류들 중에서 엄선해라. 독일과 미국에도 사람을 보내서 교관들을 모셔와라.”

전국에서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바오딩군관학교 입시를 앞둔 장쉐량(張學良·장학량)도 동북강무당 포병과에 지원했다. 소식을 들은 장쭤린은 반대했다. “딴 데로 가라. 입학 며칠 만에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 내 체면이 깎인다.” 장쉐량이 고집을 부리자 “훈련 받다 죽을지도 모른다”며 허락했다.

1기생 졸업식이 다가오자 주위에서 장쭤린에게 축사를 권했다. 공개된 자리에서 연설을 해본 적이 없는 장쭤린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래도 자꾸 권했다. “미래의 골간(骨干)들이라며 직접 길러내신 졸업생들입니다. 자식이나 친조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직접 축하를 해주시는 게 도리입니다.” 장쭤린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건 나도 알지만 연설을 해본 적이 없다. 축사건 뭐건 원고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전쟁판에서만 굴러먹다 보니 머리에 든 게 없어서 만들 재간이 없다.”

국가원수 시절 미군 군사고문과 함께한 장쭤린(왼쪽). 1928년 1월 베이징.

부하들이 만들어온 연설문은 품위가 있었다. 장쭤린도 내용이 좋다며 싱글벙글했다. 몇 날 며칠을 방안에 틀어박혀 깡그리 외어버렸다. 표정과 손놀림 등 연습도 철저히 했다. 자신이 생겼다.

졸업식 날 장쭤린은 위풍당당하게 연단에 올랐다. 졸업생들을 보자 갑자기 눈앞이 아득했다. “나 장쭤린은 말 위에서 반생을 보내며 전쟁터를 집으로 여겼다.” 이게 다였다. 다음부터는 생각이 안 났다. 같은 말만 계속 반복했다.

졸업생과 내빈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진땀을 흘리던 장쭤린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에이, 빌어먹을(他媽的), 사실은 누가 멋있는 원고를 만들어줬다. 막상 와보니 무슨 놈의 분위기가 이렇게 엄숙한지 갑자기 다 까먹어버렸다.”

그러곤 연단을 내려왔다. 식장을 한 바퀴 돌며 어려 보이는 생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이는 몇이냐. 고향은 어디냐”에서 시작해 “참 잘생겼구나, 큰 누님이 면회 오면 내게도 알려라”라는 등 온갖 싱거운 소리를 다했다.

장내에 서서히 긴장이 풀리자 다시 연단으로 올라갔다. “너희들을 보니 정말 기분이 좋다. 하고 싶은 말이 워낙 많다 보니 생각이 잘 안 난다. 천하의 대세가 어떻고, 중국의 미래가 어떻고, 이런 것들은 알 필요도 없다. 삶을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된다. 앞으로 천하의 주인은 너희들이다. 공을 세우면 상을 주겠다. 내 일가친척 중에는 별난 놈들이 다 있다. 나를 믿고 거들먹거리면 두들겨 패라. 그런 것들은 맞아 죽어도 상관없다. 보고할 필요도 없다. 내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내게 말해라. 뭐든지 다 주겠다.” 그리고 자리를 떴다. 박수가 요란했다.

제자리로 돌아가던 장쭤린이 다시 연단으로 올라왔다. “조금 전에 뭐든지 다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말을 잘못했다. 나랑 사는 여자들은 줄 수 없다. 달라고 하지 마라.”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동북강무당은 동북군의 요람이었다. 윈난(雲南)강무당. 바오딩(保定)군관학교, 황푸(黃埔)군관학교와 함께 중국의 4대 군관학교 중 하나였다. 개교 일자도 쑨원이 광저우에 설립한 황푸군관학교보다 6년 빨랐다. 훗날 신중국의 장군도 13명을 배출했다

장쭤린에게는 6명의 부인이 있었다. 다들 장쭤린에게 순종했다. 셋째 부인 다이셴위(戴憲玉·대현옥)만은 예외였다. 장쭤린은 31살 때 다이셴위를 처음 만났다. 마을 파출소장 아들과 어릴 때부터 약혼한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집으로 데리고 왔다. 다이셴위는 옛사람을 잊지 못했다. 분통이 터진 장쭤린은 파출소장 아들을 죽여버리려고 작심했다. 눈치를 챈 파출소장 아들이 도망가자 다이셴위는 방문을 걸어 닫고 장쭤린이 와도 열어주지 않았다. 친정 동생도 속을 썩였다. 술에 취해 거리의 가로등을 모두 깨버리는 바람에 장쭤린에게 총살당했다.

천하의 장쭤린도 다이셴위만은 어쩌지 못했다. 맨몸으로 집을 나온 다이셴위는 불문에 귀의했다. 장쭤린은 비구니가 된 다이셴위를 위해 절을 한 채 지으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1916년, 시름시름 앓던 다이셴위가 세상을 떠나자 직접 염(殮)을 하겠다며 절을 찾아갔다. 다이셴위의 유언이라며 그것도 거절당했다. 다른 부인과 자녀들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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