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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차르 푸틴'을 만든 건 한심한 러시아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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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2011년 12월 열린 러시아 자유주의 성향의 야당 ‘야블로코당’ 전당대회 모습.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야블로코당 당수는 2000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푸틴에 패했다. [사진 이후]

러시안 다이어리
안나 폴릿콥스카야 지음
조준래 옮김, 이후
480쪽, 2만3000원

“최고 수준의 언론을 향한 쉼 없는 열망을 가진 대다수 사람들에게 안나 폴릿콥스카야는 밝게 타오르는 등불, 또는 완전성·용기·헌신을 재는 척도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 존 스노우는 안나 폴릿콥스카야 기자의 진실을 향한 열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러시안 다이어리』는 폴릿콥스카야 기자가 2006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기자의 노트북과 다른 곳에 기록된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푸틴은 2000년부터 러시아 권력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폴릿콥스카야 기자가 남긴 기록은 푸틴과 그의 권력 엘리트들이 권력을 공고화하는 과정의 맨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저자의 관찰은 2003년 푸틴 집권 1기말 치러진 총선과 대선에서 시작된다. 이 두 선거에서 민주주의 진영은 푸틴의 애국주의, 민족주의, 강대국 러시아라는 선거 전략에 패배했다. 폴릿콥스카야 기자는 이러한 현상을 취재하면서 푸틴의 권력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을 염려했다. 그의 예상은 맞았다.

모스크바 근교의 트로예쿠롭스코예에 있는 안나 폴릿콥스카야 기자의 묘지. 시민들이 보낸 추모의 꽃이 놓여있다. [사진 이후]

 러시아 민주주의의 쇠퇴 원인은 폴릿콥스카야 기자가 현장에서 관찰한 기록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1990년대 민주주의가 대의적 합의제로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행정부와 의회권력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각종 개혁은 발목을 잡혔다. 대공황 못지않은 경제침체는 결국 1998년 경제위기로 귀결됐다.

 저자는 당시 TV를 통해 생중계된 러시아 의회에서 하원의원들이 오만하면서도 현실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이 정치권에 실망하게 됐고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소모적인 논쟁으로 개혁을 지체하는 가운데 부유층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좇아 푸틴의 새로운 권력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빈곤층은 그들의 문제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던 민주주의자들보다 그들에게 구원의 손을 뻗었던 푸틴의 민족주의·애국주의를 지지하게 됐다. 오늘날 러시아 정치의 작동방식이 과거 소련 공산당 중앙정치국처럼 푸틴과 그 주변의 몇몇 권력자에게 집중되는 ‘과거체제로의 회귀’가 나타나게 된 배경이다.

 폴릿콥스카야 기자가 가장 오랫동안 취재한 것은 체첸문제였다. 그의 취재 덕분에 어떻게 러시아 권력이 체첸 전쟁을 통해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정당화했고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아가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으로 이어졌던 색깔 혁명 국가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러시아의 국익이 어떻게 투영되는지에 대한 통찰도 얻을 수 있다.

 안나 폴릿콥스카야는 두 아이를 가진 어머니였지만, 러시아 권력자들이 국민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알려주고자 그는 자신에게 발생하는 위협을 감수하고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그래서 한 명의 기자가 남긴 기록이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 책 제목을 기꺼이 『러시안 다이어리』 라고 명명했다.

 두 가지 아쉬움이 있다. 책에 관한 아쉬움은 취재가 권력의 문제에 초점을 두다 보니 민주주의 진영이 무기력한 모습을 갖게 된 이유를 보다 밀도 있게 취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아쉬움은 폴릿콥스카야 기자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푸틴의 3기 재집권 과정과 최근의 우크라이나 마이단 광장 시위, 러시아의 크림 합병 과정 등에 대해서도 끈질기게 파고들었을 것이다.

이상준 국민대 교수

이상준은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 『CAREC(Central Asia Regional Economic Cooperation)의 현황과 한국의 협력방안』(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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