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이디오피아 행 3등 야간열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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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프랑스」영 「소말릴란드」는 우리 나라 경상북도보다 조금 큰 나라지만 인구는 약 10만인, 예로부터 홍해의 문호로 일컬어지고 있다. 자연히 이민족의 피가 섞여 이른바 역사의 혼혈아가 되었다. 유전 법칙으로서 혼혈은 우성을 더 많이 낳게 마련인지 미인이 많이 보인다.
이 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말리」족들은 살갗은 연한 흑색이지만 골격은 「유럽」사람처럼 입체적이며 특히 여자들은 오묘한 매력이 있어 지나다니는 미인들을 보는 것도 희한했다.
이 나라는 사흘밖에 머무를 수 없고 보니 볼 것은 많고 하여 온종일 종종 걸음으로 쏘다녀야 했다.
이국 정서가 넘치는 열대 특유의 숲 속에 하얀 「프랑스」식 건물들이 유난히 눈부신데 건물들이 하얀 까닭은 햇빛을 되도록 덜 받기 위해서다. 그리고 열대의 뜨거운 햇빛을 막기 위하여 추녀가 길고 보도도 건물 안에 마련되어 있다.
「트레불러·체크」를 바꾸려고 은행에 갔더니 계엄이란 아랑곳없이 원주민인 은행원이 우아한 「프랑스」말로 매우 친절히 맞아 주었다. 흑인계인 은행원이 굵직한 목소리로 특히 「프랑스」말의 비음을 뇌까리는 것은 「프랑스」본토 사람보다 더 멋있으며 매우 음악적으로 들렸다. 이곳의 환율은 1「달러」에 176「지부티·프라노」다. 이 나라 동전의 「디자인」은 낙타가 새겨져있는데 「프랑스」의 미술을 본받아서인지 예술적이다.
「프랑스」가 남긴 것은 미적 의식인지는 모르나 제염(제당)과 목축으로 경제를 유지하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오직 생산만이 구원의 손길일 것 같았다.
관공서의 근무시간은 오전 7시30분부터 11시30분까지고 오후는 3시30분∼5시30분까지니 하루 불과 6시간 밖에 일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은 4시간이나 되는데 이곳은 열대로서 낮이 가장 덥기 때문에 더위 속에서 일을 볼 수 없어 모두들 자기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푹 자는 것이다. 이 같이 날마다 낮에는 서너 시간을 자니 남가일몽을 꿀 법도 한데 어떤 「프랑스」사람은 낮잠은 안식이 아니라 그대로 「죽음의 연장」이라고 했다. 자연적인 조건 때문에 비록 낮에 쉰다고 하지만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는 뜻일 것이다.
「지부티」항은 「프랑스」의 군항으로서도 쓰이고 있는데 이번 사건으로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총독부의 2층 관저는 돌출부에 있어서 시내와 부두에서 한눈에 불수 있어 시민들은 언제나 「프랑스」국기를 바라보게 되어있다.
여기서 하루 사이에 형제처럼 친해진 「소말리」족인 유지는 『굳이 우리들이 피를 흘려 싸우지 않아도 머지 않아 저 「프랑스」총독 관저에는 「소말리」독립국의 깃발이 나부끼게 될 것이며 지금이 관저를 지키고 있는 우리 원주민인 군인들도 우리 독립국의 군인으로 바뀔 것입니다』라고 귓속말로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다음엔 이웃나라인 「소말리아」로 들어가려고 교통 수단을 알아보았으나 「스쿨·버스」 납치사건으로 국경을 차단했을 뿐 아니라 항공 교통마저도 폐쇄됐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디오피아」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지부티」에서「아디스아바바」까지 가는 밤차를 탔다.
이 철도는 「프랑스」가 9년이나 걸려 1917년에 완성한 사철로서 좁은 궤도이지만 2등 침대, 2·3등으로 나뉘어 있다. 나는 물론 3등을 타기로 했는데 「벤치」처럼 널빤지로 깐 초라한 차량이었다.
승객들은 거의 모두가 원주민들인데 사람들은 많은데다가 보따리들을 의자에 놓고 있어 앉을 자리가 없다. 이 나라는 유목민이 많은데 이 기차에도 많이 탔는지 몸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다. 내가 무거운 「륙색」을 진 채 두리번거리고 있노라니 저 만치서 곱살하게 생긴 여인이 미소지으면서 자기 보따리를 치워주며 앉으라고 권한다. 마침 행선지가 같아서 좋은 말벗을 사귀게 되었다.
이 기차를 타기 전에 역전에서 값싼 「비스킷」을 사서 저녁을 때웠으나 몹시 출출해 하던 참에 이 여인이 주는 도시락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사랑은 국경을 넘는다지만 낯선 나라의 야간 열차에서 이성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최대의 흥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정거장도 못 가서 군인들이 올라타더니 이 여인이 「소말리」족이라고 「플래쉬」를 비추며 수사를 하는 것은 가슴아팠다. 나는 마음으로 이 나라의 행운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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