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전성기는 지났다|미 작가「존·업다이크」가 내다 본『소설의 장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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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장래의 소설은 어떤 방향을 추구할 것이며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 이것은 현대문학에서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과제다. 『이 시대의 가장 천부적인 미국작가』로 꼽히고 있는「존·업다이크」는 최근 제25회 미「내셔널·부크·어워즈」기념식전에서『소설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강연을 했다. 강연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주>
18세기의「새뮤얼·존슨」은「소설」이라는 어휘를『일반적으로 애정을 다룬 작은 이야기』라고 정의했었다. 물론 이 말은 14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이 쏟아져 나온「이탈리아」의「노벨레」에서 연유한 것이다.
「복카치오」가 대표적 예이며「셰익스피어」도「노벨레」에서 줄거리를 많이 따왔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영국에서의 소설형태는 훨씬 다양하고 폭이 넓은 것이었다. 「리처드슨」은 편지를 모방했고「데포」는 항해일지 같은 것을 모방했다.「필딩」이나「제인·오스틴」에게는 사회의 한 미 입체였다.
19세기에 들어 짧은 것이 적당하다고 여겨졌던 소설의 길이는 차차 긴 것이 실제적이라는 경향을 보여「테니슨」은 이상적인 소설을『계속되고 계속되어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무렵「프랑스」사람들은『간통 없이 소설은 없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영어권 세계의 소설보다「프랑스」의 소설이 더욱 진실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반영 때문이라 기 보다 오히려 소설이라는「장르」의 특색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랑과는 거리가 먼 관심의 영역도 있다. 가령 질병이라든가 고통 따위가 그것인데, 그러나 소설 속에서 이들을 가지고 재미있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돈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는 소설을 단순하게 새 인기업체의 한 생산품으로 표현하고 싶다.
국가·민족, 그리고 교회가 개인생활의 정서적인 면으로부터 물러날 때 이 생산품을 위한 새로운 시장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때 「에로틱」한 사랑은 모든 흐리멍텅하고 죽어 가는 감각들을 위한 하나의 상징처럼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감정의 음모이다. 「마르셀·드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부터 「블라디미르·나보코프」의『로리타』에 이르기까지 가장 우아하고 존경받을 만한 현대소설들은 모두 이 같은 음모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제임즈·조이스」의 걸작『율리시즈』역시 궁극적으로는 연인들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소설의「빅토리아」적 전성기는 지나가 버렸다.
만약 나의 느낌이 옳은 것이라면 그와 같은 소설의 자본주의는「섹스」를 마술상자에 넣고 그 마술상자는 실컷 두드려 맞은 후에 붕괴될 것이다.
19세기의 소설이나 20세기의 영화들에 있어서 간통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잘못 이해한 것인지 아닌지 간에「프로이트」는「섹스」에다 지적인 자유를 주었다. 「헨리·밀러」의 소설들은 소설이 아니다. 그 작품들은 개인적 장광설로 번갈아 이어지는 성교의 행위들일 따름이다. 그들은「톨스토이」보다는『아라비안·나이트』에 가까우며 소설이라기보다는 이야기일 따름이다.
어떤 작가들은「밀러」의 방법을 계속할 것이며 또 어떤 작가들은「포르노그라피」에 아주 가까운 성교에 관한 개인적 서술에 다소간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많은 소설들이 변화무쌍한 선정적 이야기의 날 화보다는 더욱 명백한 목적을 위해「로맨틱」한 소설구성방법을 차용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앞으로 철학으로서의 소설의 새로운 방향이나 목적으로서의 소설의 방향이나 이 두 가지 방향은 모두 효과적으로 추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 것이다.
몇 몇 소설들은 틀림없이 철학적 혁명의 전달방법으로서 봉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루소」새로운「마르크스」, 새로운「키에르케고르」가 나타나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미「다이얼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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