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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멘트 시장, 손잡은 100년 앙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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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세계 시멘트 시장을 놓고 1위를 다투던 홀심과 라파즈가 7일(현지시간) 합병 계획을 발표했다. 스위스에 위치한 홀심 공장에 라파즈(오른쪽 건물) 로고를 일부 합성한 사진.

‘적과의 동침인가, 빚더미 합병인가.’

 세계 시멘트업계에서 100년 넘게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툼을 벌여온 앙숙이 손을 잡았다. 세계 1위 스위스 홀심과 2위 프랑스 라파즈가 7일(현지시간) 합병을 공식 발표했다. 공동 성명에서 “재료산업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회사를 만들려는 목적에서 대등 합병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두 기업 이사회 모두 합병 계획을 승인했다.

 이번 발표는 합병설이 흘러나온 지 사흘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글로벌 시멘트 시장이 그만큼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로이터통신은 “합병이 성사되면 기업 가치를 기준으로 550억 달러(약 58조1900억원) 규모의 초대형 시멘트 회사가 탄생한다”고 전했다. 홀심은 시멘트 판매량을 기준으로 세계 1위에 올라있다. 라파즈는 홀심을 바짝 뒤쫓으며 2위를 차지하고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들 회사는 늘 1위 자리를 놓고 경쟁해온 맞수다. 새 시장을 뚫기 위해 아시아·중동으로 앞다퉈 진출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쓰러진 한라시멘트를 사들인 것도 라파즈였다. 이 회사는 벽산과 동부한농화학 석고보드 사업부문을 잇따라 인수하기도 했다.

 시멘트는 대표적인 장치산업이다. 석유화학이나 반도체 산업과 비슷하다. 진입 장벽이 높고 신규 설비를 갖추는 데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한 번 투자 시기를 놓치면 돌이키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경쟁사를 무작정 따라가며 공장을 늘렸다간 투자금을 건지지 못해 파산할 수도 있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말할 것도 없다. 70~80년대 한국 경제를 호령하던 국내 시멘트 산업이 외환위기를 계기로 사양산업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시멘트 시장을 다시 한번 시험에 들게 했다. 중국을 제외하고는 시멘트나 골재 수요가 곤두박질했다. 홀심과 라파즈도 경영 위기를 겪었다. 100년 앙숙인 두 회사가 ‘적과의 동침’을 택한 것도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풀이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말 기준 라파즈의 총 부채는 103억 유로 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홀심도 95억 유로 부채를 안고 있다. 실상은 ‘빚의 합병’이라는 얘기다. 당장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로부터 시멘트 시장 독점에 해당하는지도 심사를 받아야 한다. 홀심과 라파즈는 각각 주식을 1대 1 교환하는 방식으로 합칠 예정이다. 양쪽 주가가 비슷해 가능한 방법이다.

 두 회사 합병이 한국 시멘트 업계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다. 시멘트는 가격에서 운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만들어 먼 지역에 수출해선 남는 게 없다. 각 지역에서 생산해 소비하는 구도가 자리 잡은 이유다. 유럽에서 큰 합병이 진행된다고 해서 국내 시멘트 생산이나 수출에 당장 큰 타격을 주는 건 아니다. 다만 시멘트 업계 관계자는 “세계 1, 2위 회사가 손을 잡아 효율성을 강화해야 할 만큼 시멘트 수요 정체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국내 업계에서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라파즈는 한국 법인으로 라파즈한라시멘트를 두고 있다. 라파즈한라시멘트 측은 “새로 출범할 라파즈홀심의 강점을 통해 회사는 다양한 혜택을 받을 전망”이라고 했다.

조현숙 기자

◆홀심과 라파즈=두 기업 모두 시멘트, 콘크리트 같은 건축용 자재를 주로 생산한다. 홀심은 스위스에서 1912년 창립했다. 70여 개국에 진출해 있고 직원 수는 7만8000여 명이다. 지난해 161억 유로의 매출을 올렸다. 라파즈는 1833년 프랑스에서 세워졌다. 62개국에 법인을 두고 있고 직원 수는 6만4000명 정도다. 지난해 매출액은 152억 유로다. 정부 승인이 떨어지면 두 회사는 ‘라파즈홀심’이란 새로운 기업으로 탈바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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