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숭배의 시작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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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원수의 칭호를 갖게 됨으로써 그의 개인적인 권위는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군인이 아닌 당의 실권자가 이 칭호를 갖게 된 것은 「스탈린」이래 소련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소련에서의 최고 영예인 사회주의 영웅 및 노동 영웅의 칭호를 함께 갖고 있는 그는 이제 명실공히 정치·군사적인 면에서의 「챔피언」이 된 셈이다. 권력 절정기의 「후루시초프」전 제1서기조차 영웅 칭호를 하나 갖고 있었으나 원수라는 직함은 갖지 못했었다.
「브레즈네프」체제는 그가 64년 당 서기장직을 맡은이래 몇 차례의 농정위기·외교 정책의 부진·노령에 의한 건강상의 이유 등 때문에 약화되리라는 추측이 여러번 나돌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이 들어맞은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런 소문이 있은 뒤에는 「브레즈네프」의 지위가 더욱 강화되는 조치가 잇달곤 했다.
「브레즈네프」가 이처럼 지위를 강화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당의 집행 기구인 서기장을 비롯한 요직에 자기의 심복을 배치해 놓았던데 있는 듯 하다. 자파 일색으로 구성된 당 서기국은 「브레즈네프」 서기장이라 불리고 있으며 「브레즈네프」의 인맥을 일컬어「드니에프르·마피아」라고 서방의 「매스컴」들은 별명을 붙이고 있다. 그의 출신지인「드니에프르」 지방 인물들을 중용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세력 기반 때문에 「브레즈네프」는 몇 차례의 난국을 유리하게 이끌어 왔다.
군부에 대한 그의 기반은 사망한 「그레치코」 전 국방상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에 대한 회유책으로 유지해 왔다. 소비재 우선 정책을 내세우기만 하고 국방예산을 증액하면서 그는 군부 내에 세력을 확장해 왔다.
그가 자신에 대한 확고한지지 세력을 과시한 것은 73년부터였다. 이 때부터 그는 「셀레핀」 등 강력한 반대파를 제거하면서. 외교(그로미코) 국방(그레치코) 치안(안드로포프·KGB의장) 농업·문학 등 5개 주요 부문 각료를 모두 자기파인 정치 국원 또는 후보 위원으로 만들어 정치 국원의 각료화를 꾀했다.
당과 주요 행정기관을 일체화하고 정책 결정에 대한 공동 책임제를 시도함으로써 당과 행정부를 모두 자기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두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농업 등 경제 문제와 대 서방 화해 정책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에 끝난 25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당 서기장직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 하나는 「브레즈네프」가 이제 소련을 지배하는 3사 체제에서 결정적인 우세를 확보, 개인 숭배 체제의 첫 발을 내디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은퇴할 준비로서 당 지도층이 그에게 마지막 영예를 준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로선 어느쪽 분석이 맞는지 단정키 어렵다. <김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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