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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기승전결 갖춘 상황극 … 요즘은 짤막한 '말발'로 승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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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코미디 빅리그’ 연습실. 이 프로그램의 인기 코너인 ‘생계형 조폭’ 연습이 한창이었다. 야구장 앞 동네 건달과 노점상인 간 갈등을 비꼬는 내용이다.

 “해물 파전에 왜 해물이 없노.”(건달)

 “이건 ‘햄을 파전’이에요. 햄을 넣었어요.”(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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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대화가 빠르게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의 김석현(43) PD는 “요즘은 대사가 길면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과거엔 시청자들이 장시간 집중해서 봐야 하는 상황극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짧은 대화가 이어지는 토크 형식의 코미디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유머1번지’ 등 1980~90년대 인기 코미디 작품을 썼던 작가 김재화(57)씨는 “과거에는 기승전결을 가진 완결된 이야기 형태로 코미디를 구성했지만 요즘엔 그중 한 가지 상황만을 강조하거나 특정 용어, 유행하는 이슈 등을 비틀어서 언어유희화하는 코미디가 많다”고 말했다. 가령 돈으로 벼슬을 산 가짜 양반이 양반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 벌이는 해프닝을 완결된 극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 과거의 코미디였다면, 요즘 코미디는 가짜 양반의 어설픈 행동을 몇 마디 말로 풍자하는 방식이다.

 JTBC ‘썰전’이나 MBC ‘라디오스타’처럼 진행자들이 앉아서 말발을 겨루는 예능 프로그램도 많아졌다. 개그맨 이윤석씨는 “20년 전 코미디 프로그램은 90% 이상이 미리 정해진 대본대로 이뤄졌지만 최근 개그 프로그램들은 대본에 의존하는 비중이 50% 정도 밖에 안 된다”고 전했다.

개그의 소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도 즉흥 연기가 많아진 이유다. 그는 “예전의 TV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곳이었지만 요즘 TV는 보통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노는 곳”이라고 말했다.

 ‘무한도전’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가 인기를 얻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배삼룡·서영춘·이주일씨 등 과거 유명 코미디언들은 바보 흉내를 내거나 서로 싸우거나 넘어지고 구르는 슬랩스틱 코디미를 주로 했다. 뚱뚱하거나 볼품없거나 바보 같은 모습을 통해 시청자의 우월감을 만족시켜줌으로써 웃음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최근의 리얼 버라이어티는 우월감뿐 아니라 공감과 동질감이라는 감정까지 충족시켜 준다.

이윤석씨는 “최근 리얼 버라이어티의 출연자들 역시 대개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긴 하지만 나와 동떨어진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이다. 그 때문에 시청자들은 이들의 분투기나 성장기에 공감하면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개그맨 김구라씨는 TV뿐 아니라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를 통해 이동하면서 시청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시청자들이 과거처럼 일정 시간 동안 특정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는 시청 환경이 아니다 보니 비디오로 확인되는 연기력보다는 귀로 듣는 오디오가 더 중요해진 것 같다”며 “연기력이 좋은 개그맨보다 말을 재치 있게 하는 개그맨들이 인기를 얻는 것도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고 말했다.

웃음, 동물과 인간의 차이

동물도 인간이 웃을 때처럼 입꼬리가 올라가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동물들의 그런 표정은 두려움이나 복종을 의미한다. 이를 근거로 학자들은 인류의 웃음도 맨 처음엔 두려움이나 복종의 의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현재 인류의 웃음은 상대방에게 해를 끼칠 의사가 없으며, 적이 아니라는 뜻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발전해 왔다. 누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긴장한다. 이때 웃음을 사용하면 긴장이 사라지고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웃음을 유발하는 농담이나 코미디는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먼저 뭔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올 듯 기대를 부풀리면서 긴장감을 높여간다. 그러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부분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을 만나, 그 긴장감을 해소시킨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고 해서 모두 웃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맥락에 맞지 않는 엉뚱한 반전이거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위험한 반전은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제시된 반전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고 안도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로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웃음의 과학』(사이언스북스·이윤석 지음)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웃는 사람을 좋아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협상장에 들어서면서 믿음직스러운 웃음을 보인다면 긍정적인 인상을 줘서 좋은 출발을 할 수 있다.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사람을 재촉한다. 빨리 생각하고 빨리 행동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은 사람을 진정시킨다. 사고방식을 확장하고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웃음의 심리학』(중앙북스·마리안 라프랑스 지음) 중에서)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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