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시사통신의 천오 특파원이 본 마지막 「사이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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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남북통일작업을 서두르고 있는 월남은 오는 30일로 적화 1주년을 맞는다. 그 동안 공산 월남은 어떻게 변모했고 패망과정의 월남내부는 어떠했는가. 다음은 73년 2월 「사이공」에 특파돼 월남 몰락과 공산화 과정을 지켜보다가 「사이공」함락 후 3개월만에 귀국한 일본 「지지」(시사)통신 전 주월 특파원 「가와마다」씨(천오 소·42)와의 회견기사다.
【동경=김경철 특파원】
-「사이공」에 부임했을 당시 전황과 정정·사회상은 어떠했는가?
「사이공」 특파원으로 부임한 것이 73년 2월이었다. 1월 28일 「베트남」 평화 「파리」협정이 조인된 직후여서 전쟁은 「정전」상태였다. 미군의 대다수가 철수하고 미군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일부 병력만 남아있었다.
전선은 대체적으로 교착상태였으나 소규모 전투는 하루 50여건씩 연일 지속되어 월남군은 월맹 측의 정전위반사항을 연일 발표하고 있었다.
정전이 되자 「바」며 「나이트·클럽」이 4월 들어서부터 다시 문을 열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미군철수에 따른 실업자가 속출하여 국민들 사이에는 불안감이 깔려있었다.
-공산군이 시시각각 수도 「사이공」에 근접해올 때 월남의 혼란상태는?
「사이공」 북동쪽 약60km의 군도 「수완록」이 함락되자 「사이공」시민들은 끝장이라는 생각에서 해외피난을 시작했다. 미국이며 「파리」등지에 친척을 찾아 출국채비를 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달러」시장이 극도의 혼란 속에 빠진 것은 잘 알려져 있다.
75년 4월초 「달러」의 공정환율은 1「달러」에 7백 50 「피아스타」였으나 4월 상순 암시세는 2천「피아스타」로 뛰었다가 다시 중순에는 2천 5백, 하순에는 3천「피아스타」까지 올랐고 그나마 「달러」를 구할 수 없었다.
해외로 피난 갈 여비도 없고 해외에 지인이 없는 사람들이 「사이공」에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월남정부는 피난민이 「사이공」시내에 운집하는 것을 막으려했으나 이때쯤 돼서는 행정기능도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티우」 대통령의 후계자로 「두옹·반·민」장군을 대통령에 앉히려는데 대해 의회가 난색을 표시하고 있었는가하면 정부고관들은 가족과 함께 해외 도피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월남정부의 부패상과 .군대의 사기저하·전의상실 등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월남정부의 부패상은 이전부터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있었다. 「인플레」가 극심하여 공무원들이 급료만으로 생활할 수 없는 실정에서 정부고관은 말할 것도 없고 하급관리 특히 일선 경찰관리에 이르기까지 부정 투성이였다. 이런 현상은 어느 정도 필요악이라는 면도 있었지만 정부고관은 미국 원조금의 다액을 착복하는 사태까지 있어 국민들의 실망은 대단한 듯했다.
월남전에서 미국이 패퇴한 원인의 하나는 월남 정부와 군부의 무능·부패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병사의 사기저하는 이 같은 오직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돈만 있으면 위험한 전쟁터에서 먼 후방부대로 전속될 수 있었다.
결국은 돈 없는 군인만 최전선에서 싸운 격인데 사기가 높을 수 있었겠는가.
-「사이공」 함락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75년 4월 30일 「티우」가 팽개치듯 버리고 간 「사이공」정부가 「베트콩」앞에 무릎을 꿇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30년간 끌어온 월남전은 세기적인 막을 내렸다.
「사이공」 최후의 날 월맹 정규군과 「베트콩」병사들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환희에 찬 모습으로 중심가에 입성했을 때 반 「티우」진영들도 공포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 잔루 보도진을 놀라게 한 것은 남부 월남의 「애국인사」들로 조직됐다는 「임시혁명정부」는 환영에 지나지 않았고 모든 것은 「하노이」의 원격조종 하에 놓여 있었으며 「베트콩」군이 있기는 했지만 월맹군이 월남전의 주역이지 지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직전까지는 대부분의 월남인과 자유세계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공산정권의 시정은 어떻게 전개돼 나갔는가?
우선 자본주의의 정신적·물질적 잔재를 뿌리뽑는 작업이 시작됐다. 미국·「프랑스」 등 서구풍의 서적과 음반 등은 모두 퇴폐·타락이라는 낙인이 찍혀 거리에서 소각됐고 구정권 하의 정치인·경제인·관리·장교·지식인들은 사상교육을 통해 세뇌과정을 거쳐야했다.
「가톨릭」과 불교 등 월남에 뿌리깊은 종교들도 서서히 탄압 받기 시작했다.
모든 금융기관과 대기업들은 국유화됐고 화폐개혁이 단행됐으며 농촌에선 토지의 몰수, 재분배 작업이 진행돼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돼갔다.
이 같은 일련의 공산화 과정은 노련한 월맹 정치인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진행됐지만 불만을 배제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최근엔 종교계, 구 월남군의 반공무장투쟁이 노골화하고 있는 것 같다.
-「베트남」의 장래를 내다본다면?
25일 실시된 남북통일선거로 이 나라는 통일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사회주의체제 국가로서 북반부 중심의 공업과 남쪽의 농업을 잘 융합하면 동남아에서는 강력한 국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성도 우수하고 자원도 있어서 장래 「아시아」에서 대국이 될 가능성이 많은데 우선 국가재건에 중공과 소련을 이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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