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제50화 외국유학시절(속)-조기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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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 초년생>
방순경씨를 따라 맨 처음 안내를 받은 곳은 그때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재학중이시던 이숙종여사가 하숙하고 계신 곳이었다. 이 어른을 처음 뵐 때 제일 인상적인 것은 빛나는 두 눈에 별 같은 총기였다. 지금 이분은 국사에 참여하시고, 한편 여성의 대변자로, 또 한편으로는 여성교육자로서 분주한 생활을 하고 계시지만 이 분주한 생활은 50여년 전 동경유학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나 넓은 포용력을 보이는 이 분의 인품과 덕망은 동경유학생들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그 옆으로 모이게 하였다. 사람들의 치다꺼리로 이분은 밤낮으로 바쁘셨다.
이분 얘기는 다시 뒤로 미루고 기숙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열흘동안을 기숙사에서 지내고 나니 개학이 되었다. 사생들이 모두 돌아왔는데 일본 학생이 50명에 한국학생은 방순경여사·이진옥씨,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뿐이었다.
동경고사에는 기숙사가 두군데 있었는데 제1기숙사는 학교 구내에 있고 내가 든 제2기숙사는 학교 바깥에 있었다.
서울에서도 일본말로 공부를 하였지만 이제는 일본말을 학교생활에서 뿐 아니라 모든 생활을 이들 일본인들과 하게 되니 용어며 풍속에서 서투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 예를 들자면 우리 한국에서는 방에 앉았다가 어른이 들어오시면 일어서는 것이 예의인데 일본 풍속으로는 모든 기거동작에서 섰다가도 앉아서 행동하는 것이 정숙한 태도였다.
남의 방에 들어갈 적에도 그 방문 앞에 앉아서 『고멩아소바세(실례합니다의 뜻인 일본상류 용어)』라고 먼저 말하고 나서 안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응답이 있으면 역시 앉아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상한(?) 이국 풍속을 익혀야만 하였다.
또 학교공부는 별로 어려운 줄 모르고 해 나가겠는데 학교에서 배운 용어이외의 일상생활용어, 예하여 밥통이니 주걱·수저 등의 말을 새로 익히느라고 고생을 하였다. 약 1주일정도는 아무 말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음식이 더 먹고 싶어도 청해 먹지도 못하였다.
일본 사람들은 밥 세 공기에 된장국 한 그릇이면 거뜬히 식사를 마치는데 한국 풍습에만 익숙한 나는 밥을 조금 들었는데 벌써 국이 떨어지곤 하였다. 상급생들이 어려워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말을 하지 못해서 더 그럴 수가 없었다.
1주일쯤 지나서야 비로소 입도 떨어지고 약간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는데 옆에서들 7일만에 그만큼 익힌 것은 아주 빨리 익힌 것이라고 부추겼지만 나로서는 죽을 고생을 한 것이었다. 『고맙습니다』『실례합니다』『미안합니다』『먼저 가겠읍니다』 등 일본 사람들의 말끝에 자주 따라다니는 겸양어와 이들의 습관을 어느 정도 익혔지만 배가 고픈 것은 마냥 계속되었다.
일본 음식이 식성에 안 맞고 무엇보다 일본간장 냄새가 역겨워서 음식을 잘 먹을 수가 없었다. 배가 고파서 잠이 깨면 새벽 서너시쯤이 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기관지염을 앓기까지 하였다.
그랬는데도 집에다 청해 먹을 줄도 모르고 병원에도 가지 않은 채 혼자 끙끙 앓으며 지냈다. 나중에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집에 연락하여 소포로 부쳐 주시는 갖은 음식-빈대떡을 비롯하여 편육까지를 먹을 수가 있었다. 빈대떡이 오면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서 빈대떡 속에 박힌 김치부터 뽑아먹고는 나머지 음식들도 벼락치듯이 금새 먹어 치우곤 하였다.
기숙사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전차(생선)를 타면 1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차는 3분마다 한 대씩 왔는데 전철처럼 여러 차량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이면 그 차량들이 모두 만원이어서 발붙일 틈이 없었다. 오늘날 동경은 초만원의 도시이지만 벌써 몇십년 전에도 인구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서투른 언어와 풍습을 익히는 고생과 음식을 못 먹는 등 객고에 시달리느라고 병까지 났지만 1학기가 끝나고 방학에 귀국을 하니 온 집안 식구들은 모두 얼굴이 좋아지고 키가 컸다고 눌라와들 하셨다.
그해 5월은 동경고사의 50주년 기념일이 있었는데 당시 일본 대정천황의 황후가 내교하였었다. 1학년 학생들은 모두 교문 앞에 도열하여 섰었는데 나는 아주 가까이서 똑똑히 그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다.
또 그해 겨울에는 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그 장의행렬이 보고싶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궁성 가까이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 자리를 잡고 앉았었다.
나중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사람사이에 끼여 7, 8시간동안은 꼼짝못하고 앉아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소변기를 팔러 다니는 장수까지 있었다. 특별히 장식을 한 수례에 운구를 싣고 그것을 소가 끌며, 신관·대의원·수상 등이 기이한 상복을 입고서 배행을 하는 장의행렬은 장관이었다.
이즈음은 이런 행사를 모두 방에 앉아 「텔리비젼」으로 볼 수 있고 「라디오」중계를 통하여 들을 수도 있는 세상이지만 이때는 이렇게 새벽같이 출두하여 육안으로 보지 않고서는 구경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니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하였다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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