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의 실패 … "위험 감수 않는 오바마 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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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현지시간)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자치공화국 수도 심페로폴 부근 기지에 배치된 T-72B 탱크 앞을 러시아 병사가 지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접경에서 훈련하던 병력을 일부 철수했으나 심페로폴 인근에 기갑부대를 추가 배치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심페로폴 로이터=뉴스1]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이미 벌어진 (크림반도) 사태를 되돌릴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상 러시아에 대한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논란을 몰고 왔다. 대부분 실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들이다. 해결사 역할을 했던 미국의 영향력이 줄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잘못된 정책’으로 이란·시리아 사태부터 갈팡질팡하더니 우크라이나에 이르러 바닥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갈등의 당사자인 러시아의 매체 ‘러시아의 소리’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대혼란에 빠졌다”며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눈이 먼 상태”라고 비웃음 섞인 독설을 날렸다.

 ‘잘못된 정책’으로 거론되는 구체적 내용은 이른바 ‘배후 주도(leading from behind)’ 정책이다. 미국은 2011년 리비아 사태를 맞으면서 모든 국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대신 뒤에서 지원하고 길잡이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비판자들은 “그 결과가 재앙”이라고 말한다. 국제전략연구센터의 앤드루 쿠친스는 “전 세계는 미국의 대응을 지켜보고 있는데, 미국의 강력한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이집트의 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했을 때에도 미국은 어정쩡한 원조 중단 카드만 내밀었다. 그 리더십 공백은 이웃 아랍 국가들이 메웠고, 미국의 제재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이 “결국 미국에 대한 신뢰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것이 쿠친스의 주장이다.

 미국의 ‘방관’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헤리티지 재단의 스티브 부치는 “미국이 이란·시리아 사태 해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것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침공을 해도 괜찮으리라는 신호를 줬다”고 분석했다. 미국 스스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재량권’을 쥐어줬다는 얘기다. 비판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위험을 회피하려고만 하고 비전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미국이 과거처럼 외국의 전쟁을 감당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감안해도 현재의 정책은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미국의 한계를 거론한 시각도 있다. 외교안보 싱크탱크 우드로 윌슨 센터의 애런 데이비드 밀러는 포린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은 국제정세에서 지정학적·역사적 변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칼날 위에 서서 생존에 사활을 걸어본 적이 없는 호사를 누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란·이집트·러시아 등 갈등 상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약소국은 자신들의 영토와 존엄·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선제적 행동을 취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잃는 것이 너무 많다. 1953년 이란 최초의 민주정권이 CIA 개입으로 몰락한 것, 러시아가 소비에트 붕괴를 겪으면서 패권을 잃은 것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트라우마는 오늘까지 이어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크림을 합병한 것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선제적 공세였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세 변화를 파악해야 하는데 미국은 늘 “과거를 극복하라”는 주문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지도자들이 순진하다는 지적도 했다. 눈앞의 유화적 제스처에 쉽게 현혹된다는 것이다. 1차 걸프전 당시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에 참전한 하페즈 알아사드 전 시리아 대통령도, 시리아·이란 사태를 중재하고 나선 푸틴 대통령도 끝내 미국의 ‘뒤통수’를 쳤다.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그의 결론은 이렇다. “미국은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순진하면서 거만하고, 이상에 빠져 홀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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