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591)제49화 외국유학시절(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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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56년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사무실은 지금의「코리아나·호텔」바른 편 골목으로 들어가 첫 삼거리 모퉁이에 있는「빌딩」2층에 있었다. 그 다음해 1957년 9월에 동경서 제29차 국제「펜」대화가 열린다는 보고가 왔다. 이때의 위원장은 필자요, 사무국장은 최완복씨 (현「네덜란드」주재 한국대사)가 담당했고, 서기는 시인 이인석씨였다.
모든 절차를 통해서 일본대회에 보내는 정대표는 정인섭·모윤숙이었고 모두 총19명을 뽑았다.
내가 투숙하고있는 제국「호텔」「로비」에서는 몇 가지의 의제가 논란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 제일 문제된·것은「헝가리」망명작가들의 출석을 허락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쑥덕공론이었다.
이것은 아마도「불가리아」등 공산국가 쪽에서 내놓을 의제같이 생각됐다.
나는 물론「헝가리」망명작가를 지지하는 편이었고, 또 대만「펜」이 가입하겠다는데 반대하는 말들이 돌고있었지만, 나는 그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인 의견을 주고 받고 했다.「호텔」「로비」에서 우연히 미국서온 소설가「스타인벡」을 만나서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카메라맨」이 와서 우리들의 면담장면을 찍었다. 그 다음에 그 사진을 구해서 그의「사인」을 받았다.
대회장에서는 나는 의장단의 한 사람이었고 일본 천단강성위원장·「펜·클럽」본부회장 등과 함께 단상에 앉아 있다가 나의 연설차례가 돼『동서문학교류』에 대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이 연설은 이미 한국서 출발 전에 여러 회원들 앞에서 공개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경에 와서는 한국대사관의 최규하공사 (현 국무총리) 가 만나자고 해서 그를 면접했더니 이승만대통령에게서 두번이나 긴급전문이 왔다고 했다.
그 뜻을 내 연실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문내용은 일본이 한국말을 말살했고 또 문화재를 강탈해 갔으니 그것을 다시 돌려 달라는 것을 강조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대사관에서 최공사와 함께 밤중까지 그것을 영어로 만들어 나의 영문연실 원본의 적당한 곳에 삽입했다. 이런 사정은 다른 우리 대표도 뜻은 알리가 없었다. 나는 연설중 특히 그 삽입한 귀절을 주창할 때는 바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연단을『꽝!』하고 두들기면서 소리를 높이 질렀다.
여러 신문에서도 나의 연설에 대한보도가 크게 났고, 아울러 번역문제에 대한 3인 위원중의 한 사람으로 뽑혀서『번역자의 지위향상』에 대한 결의문을 만들어 만장일치로 채택되게 했다. 이 즈음 일본에 사는 교포들도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또 대만「펜」가입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 연설도 했다. 그 당시 9월5일자 일본말로 된 동경발 UP특약 5일 KP통신을 다음에 요약한다.
『국제「펜·클럽」29회 대회의 한국대표는 4일 당지에서 한국현대문학은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의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일본이 한국통치중 한국인 작가를 탄압한 것을 맹렬히 비난했다. 정대표의 연설은 일본의 한국작가 압박에 대한 통렬한 공격으로 일관했다. 』나는「서양문학과 한국현대작가」라는 대목에서는 다음 같이 연설했다.
『…한국은 먼저 중국 그리고 이어서는 일본의 노예가 됐다. 일본제국주의는 모든 가혹한 수단으로 한국의 정치지도자 뿐 아니라 한국지식인까지 압박했다. 더구나 한국의 작가는 소위 그들이 싫어하는 위험분자라고 취급되어 언론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 인권을 박탈당했다, 그래도 그와 같은 곤란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작가들은「펜」으로써 단호히 일본의 압박에 저항했다.
일본은 한국 작가의 작품을 엄격하게 검열하고 또 한국인이 한국말과 서양말을 배우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는 한국의 문학적 발전을 크게 방해했다. 그러나 한국작가는 깊은 동양미학에 근거를 두고 피압박민족의 감정을 가미한 독자적인 수법으로 발전됐다. 일본이 갖고 간 한국의 예술품은 반환돼야 한다. 장래의 한국문학의 성격은 통일문제의 해결에 걸려있다 해도 틀림없다.…(이하략)』<계속> 정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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