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충기 부장의 삽질일기] 야동 아저씨가 떴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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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혀

시골 동네 형님이 내 옆 밭에서 호미질 1년하고는 그만뒀다. 쳇, 농사는 손 야무진 형수가 다 지으시더니만. 서리해먹는 재미 하나가 없어지나 해서 아쉬웠는데 더 멋진 대타 둘이 삽질의 대오에 가담했다. 친구 용석 군과 세일 군이다.

용석 군은 목계강변 소태면 야동리 출신이다. 내가 난 곳과는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동네다. 한자로 冶洞理이니 ‘풀무마을’이란 멋스런 뜻인데 그놈의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세인들의 입방아를 피하려 야동초등학교는 간판을 한자로 바꿨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이 용석 군 맞는가?

가까운데 있는 이류면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지명 때문에 우는 동네가 꽤 있다. 연탄리, 압사리, 고도리, 관음동, 사정동, 후지리, 도로리, 설마리, 고문리, 신음동, 사탄마을, 목욕리…. 대박리처럼 대박 난 동네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야하고 기막힌 청국장을 먹고 있다. 용석 군이 보내준 야동리 항아골 청국장이다. 콩의 식감이 통통 튀는데다 발효향이 적당히 큼큼하고 잡내가 섞이지 않아 나 같은 아저씨 입에는 착착 감긴다. (1등은 내 집에서 띄워먹는 청국장이다)

친구 같은 후배 세일 군은 건축 설계를 한다. 지난주 화요일 점심 무렵, 인사동 갤러리에 들렀다 나오는데 아니 저 사거리 모퉁이에 이 친구 뒤통수가 보이는 게 아닌가.

- 어이, 세일 아자씨

- 으허 깜딱이야, 성님 여그서 이기 웬일이래유

- 내말이 그말이여. 동상은 대낮부텀 읍내 나와서, 거그 뭐가 있다구 하늘을 뺑뺑 돌려 쳐다보는겨, 코피가 터져서 목구녁 뒤로 넘어가는겨? 목이 빠진겨, 아니믄 앤이 튀어서 눈물이 앺을 가리는겨?

- 아니 그거이 아니구 일하구 있어유

- 삽질은 땅보고 허는디 뭔 일을 고개를 쳐들고 한댜. 하늘 무너질까봐 그려?

- 저그 저 쪼만한 가게를 세 채 묶어 건물 하나 지어야 허는디, 구청서 주문이 많네유. 그려서 어쩔까 하구 함 나와서 둘러보는규

- 와이구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을 허구 댕기는구먼. 자네는 우리 같은 백수하고는 아예 다른 인종인 거여

- 이거저거 신경이 여간 쓰이는 기 아뉴

- 근디 어쩐댜 이렇게 장바닥서 만나기가 탄금대 솔밭에서 바늘찾기 보담 더 어려운 거라 밥 한잔 허면 좋겄는디 나가 따로 약속이 있구먼

- 우쩌것시유, 어여 가유

입맛을 다시며 헤어진 세일 군과 야동 용석 군을 건너다보며 땀 뺄 내 한해 삽질계획서는 이렇다.

산 쪽의 미나리꽝 옆에 붙은 밭 다섯 평은 주로 키 큰 작물들 차지다. 지지대가 필요한 가지 토마토 완두콩 오이를 산 쪽으로 심고, 그 옆 절반에 고들빼기와 감자를 나눠 심을 생각이다.

그 옆 햇볕 잘 드는 다섯 평은 키 작은 쌈채소들 차지다. 상추는 잎 모양과 색깔을 섞어, 녹치마상추 청풍치마상추 조선흑치마상추 진풍적축면상추 4가지를 구했다. 이들 옆에 양상추 트레비소 모듬치커리 적오크 청겨자 적겨자 대파 봄배추 열무 총각무 근대 콜라비 쑥갓 시저스그린 생채 꼬마당근을 심어야겠다. 아무래도 쓰임새가 많은 대파 면적이 크겠다. 트레비소와 콜라비는 처음이다. 비트 꼬마당근 봄배추 대파 쑥갓 총각무 아욱 근대는 작년에 뿌리고 남은 씨앗이다. 차 트렁크에서 겨울을 나 제대로 싹이 틀지 알 수 없다.

고추 양배추 아욱은 밭의 남쪽 경계를 따라 교차로 심고, 20일무 곰보배추 시금치는 북쪽 경계에서 뿌리를 내릴 거다. 옮겨 심은 지 이태 째인 참나물과 지난 초겨울 옮겨 심은 부추는 별 일 없다면 밭둑에서 풍성한 싹을 밀어 올리겠다. 쓸모없는 풀인 줄 알고 작년에 수시로 뽑아냈던 차조기는 기대가 크다. 작년에 두포기 심었다가 망한 호박을 올해는 몇 포기 더 심을 터인데 거름은 여전히 하지 않을 생각이다. 뭐 대단한 뜻이 있는 게 아니고 그냥 귀찮아서다. 밭 주변 여기저기에 꽂아놓은 머위가 올해는 또 얼마나 세력을 확장할지 궁금하다.

세어보니 채소가 33가지다. 작년에 떨어져 날린 들깨도 어느 구석에서인가 싹이 틀 터이니 34가지가 되겠다. 심어놓고 까먹은 애들도 있을 테니 무엇이 고개를 내밀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날씨가 정신이 나가 온 천지가 하루아침에 꽃 사태가 났다. 지난 주말에는 나 또한 정신이 없어 밭에 나가보지 못했다. 지난해 부러진 두릅가지에 물이 오르고, 민들레며 냉이의 포기가 한껏 벌어졌을 테다. 고개 드니 산마다 산벚 하얗고 발아래는 목련잎 무참하다. 염병할 사월이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벚꽃이 사흘 만에 올라왔단다. 이번에는 시기 가리지 않고 씨앗들을 한꺼번에 부을 작정이다.

때로는 편승도 지혜다.

안충기 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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