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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는 실권파의 재기를 경계했다|중공 권력구조개편과 대자보운동의 배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최근의 중공권력층의 「이섭」은 혁명의 전통을 영속화하려는 모택동의 집념이 또 한번 다른 모든 요인들을 휩쓸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예상된 등소평의 주은래 전 수상 승계가 수포로 돌아간 대신 의외의 화국봉이 수상서리로 임명된 뜻밖의 사태는 뒤이은 권력개편 징조로 일관성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모는 주와 한 때 나마 그를 이후의 잠정적 후계자로 등소평을 세우기로 동의했던 것 같았다. 모가 그런 동의를 깨버리고 바로 문혁파를 전면에 내세운「이변」은 주의 와병 중에 진행된 지나친 「등 중심화 현상」에 기인한 것 같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모의 우려는 지난12일자 인민일보에 이성이란 이름으로 게재된「비림 비공 운동의 계속적 필요성」이란 논문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이 글에는 목적만 좋으면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유명한 등 어록을 싣고 이어『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자』로 명백히 등을 지목해서 공격했다.
이 글은 ▲「노·중·청삼결합」원칙을 무시한 등의 인사정책과 당 조직의 오류 ▲교육계·과학·기술분야의 우경화 풍조와 ▲복권인사들의 태도 등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등이 문혁 이래의 지침이 된「노·중·청삼결합」인사 원칙을 무시했다는 문혁파의 반발은 우선 군에 대한 등의 인사내용을 보면 곧 드러난다.
73년 임표계 군부실력자들이 대거 숙청된 후 그 자리에 들어선 인물들의 95%(일 군사 연구지)가 등의 과거세력기반이었던 제2야전군계 출신이었다. 이 숫자는 전체군부요직의 3분의1에 해당하며 나서경 전 총 참모장(국방 과기위 책임자)·전종 전 정치부 부주임(현직에 그대로 복권)등이 포함된다. 이들의 복권은 대부분이 주의 와병으로 등의 권력이 강화되던 74년 후반부터 75년5월까지의 시기와 일치해 이루어 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문혁 때 실권파로 몰렸던 인사들도 90%(유고 「탄유그」통신)가 복권되었는데 지난해 건국기념식에 참석해 명단이 발표된 74명의 고위층 중에 이들이 문혁 이전의 노선으로 복귀하려는 조짐을 드러낸데 대해 문혁파가 위기감을 느꼈고 모택동이 이를 뒷받침한 데 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교육·과학계에 심했던 것 같다. 지난 연말부터 비롯된 교육계의 반수정주의 운동은 문혁 초 쫓겨났다 복권된 유수청화대학 혁명위 부주임이 도화선의 역할을 했다.
유는 모에게 학생들의 지방파견(하방운동)은 중지되어야만 하며 노동자·농민·병사의 대학입학 허용은 대학의 학문수준을 저하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에 문혁 이전의 교육제도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서한으로 주장했던 것이다.
이같은 등 중심화 경향이 경제발전과 더불어 수정주의 노선으로 치달릴 것이라는 모의 생각은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즉 지난해 항주 등 중공각지에서 벌어졌던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요구 소요는 명백히 수정주의 경향을 보인 것으로 분석됐다. 모는 8억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는 농촌의 발전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아 왔다. 그런데도 75년 노동자와 농민간의 1인당 저축액은 각각 1만5백원과 7백80원이었다.(파·이스턴·이커노믹·리뷰지) 그 비율은 약13대1로 노동자들이 농민들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시노동자들은 불만을 표출했던 것이다.
게다가 76년부터 시작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특히 인민공사의 대규모화를 통해 녹색혁명의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74년의 식량생산량이 2억6천만t인데 비해 최종연도인 80년의 목표생산량은 무려 4억t이라는 야심적인 계획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혁명적 열의를 생산활동으로 유도해야할 중대한 상황인데도 문혁 이전의 노선으로 돌아가자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단호히 정화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모는 생각한 것 같다.
따라서 모는 당 선전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요문원 등의 문혁파로 하여금 반수정주의 운동을 전개토록 했다. 그리고 바로 동향인이고 또 문혁파 중에서도 모가 나지 않은 농업전문가 화국봉을 등소평 대신 수상서리로 지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등소평의 군부세력을 휘어잡기 위해 와병으로 활동할 수 없는 엽검영 국방부장 대신 문혁파인 진석련 부수상 겸 북경군구 사령을 그 서리에 앉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근의 중공권력층의「이변」은 공홍문·장춘교·화국봉·요문원 등의 문혁파가 모의 이상과 원칙들을 자신의 사후에까지 고스란히 이어받아 영속화시키게끔 모 스스로가 기선을 제해 취한 조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수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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