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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외국유학시절(제49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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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빛」모임>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많은 한국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었다. 1924년 9월1일의 관동 지진은 일본인들을 거의 절망속에 빠뜨렸으며 그들의 혼란된 심리를 딴데로 돌릴 심산으로 사실무근한 소문을 만들어 한국사람이 그들의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등 거짓 선전을 했다.
나는 마침 그해여름 방학때 귀국하여 고향에서 휴양하고 있었는데, 새 학기가 9월1일이었지마는 아직도 여비와 등록금의 준비가 덜돼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웬걸! 동경에 큰 지진이 났고 큰불이 나서 온 도시가 폐허가 됐을뿐 아니라, 무수한 한국사람과 학생들이 억울한 학살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뿐만 아니라 그 동안 내가 학창에서 무리한 공부와 지나친 활동을 했고, 그리고 또 K.ESS(영어회사무실)바로 옆에 있던 「시멘트」「바닥으로된 우천체육관 안에서 한해 선배인 이상백등과 「바스키트볼」연습을 지나치게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당시 나의 건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일본서 의사진단으로는 폐침윤이라고 해서 약을 먹어가면서 당분간 휴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이런 끔찍한 소문이 돌았으니, 나는 동경가는 것을 단념하고 한 학기를 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동경에 살아남았던 한국유학생이나 다시 들어간 학생들간에는 일부에서 무언가 비밀히 민족적 결사를 마련하려는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물론 각 대학에도 그런 움직이는 기미가 있었겠지마는 가장 뿌리깊게 또 폭넓게 마련된 곳은 조초전대학이었다고 생각든다.
「한빛」모임은 회칙도 없고 임원조직도 없고 회비납부의 의무도 없었다. 그 이유는 그런 것이 있으면 그것이 또렷한 조직체로서의 윤곽이 드러나기 쉽고, 또 그 때문에 파벌이 생기기 쉬울뿐 아니라 거북한 부담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잘 모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데 유인한 것.
이러한 까다로운 형식이 없는 희미한 조직이었지마는 그 정신적 단결은 형식이상으로 서로 믿고 서로 협조하는 신비로운 단체였다. 전공은 각각 달라도 그 공통분모는 민족소생의 실질적 선구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관계한 둘째의 조직이다.
조도전대학 정치과의 전진한.함상훈.김원석, 그리고 명치대학 정경과의 김준섭, 동양대학의 이시목, 입교대학의 김용채등은 정치와 경제방면에 관심이 컸고, 조도전대학 문학부의 이선근.양인섭.서원출.임태호.진태완, 그리고 법정대학 문학부의 이하윤.홍재범, 그외에도 동경고사의 강재호.김명화, 청산학원의 장용하, 또 외국어학교의 함대훈등은 문학방면에 뜻을 두었고, 조도전대학 이공학부의 김봉집.김윤기.김노수.유한상, 그리고 동경고공의 유동진.임상식등은 공학방면을 담당하였고, 농업대학의 이세환이 중심되어 농우연맹을 추진하였고, 자혜의대의 박용하는 의학방면을 추진했다. 그 외에 불란서에서 유학하던 공진항도 여기에 가입돼 있었다.
그런데 이분들은 각각 서로 서로가 동창의 연분이 있는 외에 개인적으로도 연쇄적으로 각각 깊은 연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서로 오래 만나는 회원이라도 무조건 오래 친해온 동지 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로 만나는 기회가 있어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강요하거나 역설하지 않지만 무엇중에 무엇가 서로 약속한바가 있는 듯한 의형제(의형제)같았다.
그러나 맨 처음 전체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1925년10월 시외에 있는 김윤기의 집에서다.
「한빛」모임은 처음에는 부분적이었다가 나중에는 하나의 전체저인 바탕으로 돼갔고, 그것이 구체적 윤곽으로 활동하기는 각각 세가지의 구체적 방향이 나타난 이미 1925년 초부터였다.
즉 정치방면에 관심있는 회원들은 그당시 학생계에 유행하던 폭본화부의 공산주의를 연구하여 그 그릇됨을 지적하기 위해서 1926년 봄에 「한빛」이란 것을 발행했다. 그리고 동시에 한림.송언필등이 1월회를 조직해서 이활.오성근, 기타유지들의 돈을 악용하여 동경에 한글인쇄소 동성사라는 것을 경영하면서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데 대항하여 민족경제의 발전을 위한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여 국산장려와 그 합리적인 배급을 도모하려 했다.
또 어문학을 연구하던 회원들은 1925년초에 외국문학연구회를 조직하여 각각 그들이 전공하는 외국어와 외국문학을 충실히 연구하고 소개함으로써 한국에 새롭고 진정한 국제적 수준의 문학적 양식을 제공하려고 했다. 동시에 그들은 1926년 1월부터 「해외문학」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재래와 같은 사이비의 번역물과 전공아닌 외국문학연구와 정확하지 않은 외국문단 소식을 배척하여 한국문단에 커다란 선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과학에 전심하던 회원들은 그들끼리 「사이언스.클럽」을 조직하여 한국의 과학발전을 도모하려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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