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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具씨 형제들 웃으며 '굿바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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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26일 서울 여의도 LG 본사 건물인 LG 트윈타워 빌딩.

이 쌍둥이빌딩 동쪽 건물 6~8층에 입주해 있던 LG전선 소속 임직원들은 이날 온종일 각종 서류와 사무 집기 등을 챙겨 짐을 꾸리는 작업을 벌였다.

16년 간의'여의도 사무실시대'를 접고 서울 강남의 아셈타워로 회사를 옮기기 위해서다. 역시 같은 아셈타워로 새 둥지를 틀게 된 LG니꼬동제련 직원들 역시 이날 함께 이삿짐을 정리했다.

늦어도 내년 초까지 계열 분리할 계획인 이들 두 회사는 구평회 고문 등 LG 창업자인 고 구인회 회장 동생 일가들이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들이다.

이 회사 홍보팀 조인묵 차장은 "계열 분리 차원에서 본사 건물을 떠나기는 하지만 LG라는 타이틀은 그대로인 만큼 아쉽거나 서운하다는 생각은 없다"며 "오히려 대다수 임직원이 올해가 제2의 창업을 준비하는 해로 생각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재계 2위인 LG엔 이처럼 통합지주회사 출범을 필두로 거대한 실험이 진행 중이다. 바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오너 일가의 경영권 정리 작업이다. LG는 1947년 창업자 구인회 회장과 사돈관계인 허만정씨가 함께 손을 잡은 이래 56년간 대를 이어 具씨와 許씨 두 집안이 사이좋게 이끌어온,흔치 않은 '장수(長壽) 동업 기업'이다.

이 같은 회사 분위기를 반영하듯 1990년까지 그룹의 사시(社是)도 화합을 강조하는 '인화(人和)'였다. 그러나 창업주의 2~3세 등 많은 직계와 일가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까닭에 오너들간의 경영권 분리 작업은 복잡한 방정식보다 풀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구본무 LG 회장과 허동수 LG칼텍스정유 회장 등 양쪽 오너 집안 출신들이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살림을 직접 챙기는 계열사만도 8개나 된다. 여기에 그룹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는 특수관계인까지 따지면 두 집안에서만 모두 2백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오너들간의 지분 정리 작업은 예상을 깨고 어느 기업보다 매끈하다.

이런 LG가 마침내 具씨-許씨 등 두 동업 가문들이 각각 '홀로 서는'분가 문제도 신중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지난 1일 화학 계열사와 전자 계열사를 합친 통합 지주회사 탄생을 전후로 본격화하고 있는 분위기다. 사실 具-許씨 두 집안의 분가(分家) 문제는 그룹 내에서 언급조차 금기시돼온 가장 민감한 사안.

이 때문에 성공적인 통합지주회사 운영과 具-許씨간의 경영권 분리라는 '두마리 토끼'를 무리없이 챙길 수 있을지 모든 기업들이 'LG의 실험'을 주시하고 있다.

◆주변 일가들의 독립은 사실상 완료형=LG 오너 일가의 경영권 정리 작업은 창업자인 구인회 회장 일가의 분가 작업으로 스타트를 끊었다.99년 11월 제일 먼저 계열 독립을 선언한 기업은 LG화재해상보험.

이 회사는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첫째동생인 고 구철회씨 일가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다. 이어 2000년 3월에 구자두(구인회 회장의 4남)씨 가족들이 경영하는 LG벤처투자가, 그해 9월엔 구자학(구인회 회장의 3남)씨의 일가가 거느리고 있는 아워홈이 차례로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지난해부터 LG전선.극동도시가스.LG칼텍스가스.LG니꼬동제련 등 이른바 '회(會)자'돌림인 구인회 창업주의 동생들이 최대 주주로 있는 4개사의 계열 분리 작업도 현재까지 순조롭다.

◆具씨-許씨,두 가문의 독자 행보 모색=50여년 이상 동업 관계를 이어온 具씨-許씨 두 가문도 새로운 관계 정립을 꾀하고 있다. 통합지주회사 ㈜LG의 대표이사인 강유식 부회장도 25일 두 집안의 경영권 분리 가능성을 처음 공개적으로 내비쳤다.

"시대적 배경에 따라 독립시킬 수 있는 기업은 가급적 독립시키는 것이 맞는 방향입니다. 그런 방향이 대세에도 맞고 개개인들의 기업 활동에 자유를 늘리는 일입니다."

이미 재계에선 통합지주회사 설립을 추진하면서 具씨 집안에서 전자.화학.금융 계열사를 맡고 許씨 쪽이 건설.정유.유통 계열사들을 책임지는 쪽으로 자연스레 협의가 이뤄진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최근 1~2년 사이 두 집안 오너 경영진간의 '경영권 교통 정리'는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우선 지난해 11월 許씨 일가는 전자지주회사인 LGEI와 화학지주회사인 LGCI가 갖고 있던 LG건설 지분 9백80만주를 사들였다. 이를 통해 LG건설은 허창수 회장 일가측이 29% 안팎의 지분을 확보했다. 반대로 증권.카드 등 금융계열사는 具씨 일가 지분이 가장 많다. 이와 더불어 許씨 오너들이 건설.유통 등 관련 계열사를 직접 챙기기 위한 자리 이동도 잇따랐다.

우선 지난해 2월 許씨쪽 집안의 좌장격인 고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의 맞아들인 허창수 회장이 LG전선에서 LG건설의 대표이사 회장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 지난해 LG칼텍스정유 회장으로 허창수 회장의 사촌인 허동수 회장이 선임됐으며 허승조 사장은 백화점.수퍼센터.유통 등 3개사가 통합된 LG유통의 대표이사를 맡아 LG의 유통사업을 총괄하게 됐다.

허승조 사장은 회창수 회장의 삼촌이다. 전자 계열사에 대한 具씨 일가의 책임 경영 체제 구축도 못지않게 두드러 졌다.

실제로 구본무 회장이 LG통합지주회사의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을 비롯해 동생인 구본준 사장이 LG필립스 대표이사로, 具회장의 당숙인 구자홍 회장이 LG전자 대표이사직에 각각 오르는 등 전자 계열 부문의 具씨쪽 책임경영 시스템이 갖춰졌다.

이와 함께 일부 계열사의 지분 확보 작업도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숙제는 남아 있다. 당장 전자.유통.정유 등 통합 지주회사의 자회사로 편입된 계열사들의 소유권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마땅한 답이 없는 상태다.

姜부회장도 "(오너 일가)들의 계열 분리 논의는 당장이라도 가능하지만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절차도 복잡하다"며 쉽지만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계의 시각은 낙관적이다. 어떤 경우라도 상생(相生)의 관계가 깨지지 않는 쪽에서 해답을 찾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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