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초 주은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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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반세기가 넘는 파란에 찬 역사에서 언제나 제2인자의 역할을 맡았던 주은래가 어제 끝내 눈을 감았다. 향년 78세.
그에게는 「부도옹」 또는 「장두초」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흙담 위의 풀이란 뜻이다. 언제나 바람에 흔들리지만 뿌리는 깊게 박혀있어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학예회에서 여주인공 노릇을 할만큼 홍안의 미소년이었다.
매우 멋있는 옷을 입었다하여 학우들의 놀림을 받으면 얼굴을 붉힐 만큼 수줍음도 많이 탔다.
중공의 지도자들 중에서는 늘 제일 가는 서구파의 「인텔리」다.
「아르바이트」 유학생으로 「파리」에 간 그는 고향의 친구에게 편지하기를 『「파리」 는 아름답다. 친구도 많고, 볼 것도 많다….』
이런 「에피소드」에서는 저 문화혁명 때 한 달씩이나 거의 자지 않고 일하던 주은래의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30년대에는 모택동에게, 40년대에는 유소기에게, 50년대에는 후배인 등소평에게, 60년대에는 임표에게 실권을 맡기고 자기는 늘 실무만을 맡았다.
여기에 그가 지금까지의 거센 당내분쟁을 이겨나간 비결이 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처세가 아니었다. 당의 단결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그의 진가가 있다.
그가 중공의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역시 그의 뛰어난 외교수완 때문이었다. 중일 전쟁 때 항일통일 전선을 가능하게 만든 것도 주은래의 조정과 설득의 결과였다.
「뉴요크·타임스」지의 「솔즈버리」기자가 전한 「에피소드」에 이런게 있다. 54년의 「제네바」회의를 마친 주은래가 「모스크바」를 들르자 소련 외무성은 그를 위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이때 주은래는 건배를 할 때마다 소련 고관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썼다.
「미코얀」이 그에게 『당신은 「러시아」어를 할 줄 알면서 왜 영어를 쓰느냐』고 「러시아」어로 물었다.
「내가 「러시아」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당신네가 중국어를 배울 차례입니다. 이렇게 주은래는 여전히 영어로 대답했다.
주은래의 일면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46년, 국공의 대립이 격화되자 그의 뒤에는 언제나 국부 측의 미행자가 있었다. 어느 날 주는 일부러 거를 세우고 자기를 미행하던 차 곁에 갔다.
그리고 미행자에게 『자네 미행기술은 형편없군. 그러다간 자넨 파면되겠네.』이 말에 미행자가 기가 죽은 사이에 그는 차로 달아났다. 그의 탁월한 외교기술은 『구동존이』로 집약되고 있다. 공통점을 찾고 대립 점은 보류시킨 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유연한 외교정책이 지금까지의 중공을 이끌어 왔다. 그가 죽었다 해서 이런 노선이 당장에 바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을만한 인물도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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