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526)|등산50년(제48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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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백년 국경분쟁>
백두산 정계비가 장군봉으로부터 한반도쪽으로 치우치기를 2km정도에 그친 것이 어쩌면 불행중 다행인지도 모른다.
청의 특사 목극등이 더 남하시키려고 수작하는 것을 제법 줏대있던 통역관 김경문이 강경한 항변과 세유로 최대한 저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대한 문제는 비문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높이 2척3촌, 폭 1척8촌 남짓한 푸르스름한 자연석인 비신에 새겨진 글자는 가로로 크게 「대청」이라 쓴글 밑에 다음과 같이 새겨졌다.
오나총관목극등봉
지사변지차심나서위압록동
위토문고어분수령상늑
석위기
강희오십일년오월십오일
필첩식소이창통관이가
조선군관.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 허 양 박도상
통관 김헌말 김경문
이 지점에서 「서위압록」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동위토문」이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압선 강원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짜기의 샘에서 비롯되므로 피차간에 명백. 그런데 토문이란 본디 송화강의 상류가 되는 백두동북쭉의 6km에 걸친 함몰지대를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토문강이동이 우리땅이라 함은 곧 우리민족이 피땀 흘려 옥토로 바꿔놓은 간도가 바로 한민족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것. 그러나 청국은 토문야 「도문강」(두만강의 중국칭)의 자기네 표음자임을 내세워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이조와 청국사이엔 2백년을 끄는 국경분쟁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비가 선곳은 2천1백50m의 대지요, 우편어깨는 압록강원이요, 좌편어깨는 아까의 토문강원이라할 건구이며, 두만강원은 백두산상봉에 가장 가깝다하는 석을수라도 동남으로 70리나 되는 여러등성이 너머에서 발원하므로 일반이 생각하는바 압록·두만 양강이 백두산정의 천지로부터 시작된다 함은 다 사실이 아니다…』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관삼기』에서).
여기에 「수촌토척지 무지견실」(고종실록함북관찰사 조존우녹)이라고 하여 이조관민이 분기해서 l883년 우리는 서배경략사 어윤중의 조사확인을 청에 통고하고 1885년에는 또다시 우리측 감계사 이중하와 청국의 감계사 덕왕등이 정계비와 토문장역을 공동탐사한 결과 우리 주장에 부합하였으나 청은 소위 대국의 압력으로 일방적인 자기네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역사상으로 백두산을 포함한 만주령유는 한민족 4백62년, 계단1백99년, 여진은 전후 3백35년, 몽고1백34년, 일본은 15년인데 비하여 우리는 단군 개국이래 3천여년으로 너무나 뚜렷한 사실이지만 국력의 허약탓으로 그들의 농락을 당한 끌이다.
이렇게 끌어오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이 문제를 도맡게 되었다.
그런데 l909년 때마침 일본이, 만주의 안봉선 철도부설권과 무순탄광이권등으로 대륙침략을 추진중 청국민이 일본령사관 습격등으로 항거하게 되자 위의 이권과 간도문제를 슬쩍 교환조건으로 하여 일본마음대로 청국과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가 청국령임을 인정해 주었다. 탄압이 심했던 일정때 어처구니없는 이 사실에 우리의 식자들은 통분절치하였다.
항거·시위를 하기도하고 또는 백두산에 올라 정계비 앞에서 마치 잃어버린 시신만지듯 하며 통곡하곤 하였다.
1926년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에서 정계비를 앞에 하고 『조선인의 게으름과 부끄러움의 탄핵자로서 듣는이 없는곳에서 소리소리 지르고있는 것임을 알겠다』고 통분했다.
l931년 민세 안재홍까지도 보았던 정계비는 그 직후 간곳없이 사라지고 대신 잡목이 서 있었다고 했다. 아마 일경이 없앤 듯, 역사를 말살하려는 일정의 괘씸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 감계사 박권등이 청사와 맞서지 못하고 하산해버린 일을 육당은 『부전의자축』(싸울 뜻 조차없는 지지리 못난이)의 곤장으로 처벌될것들』이라 분노했었다.
지난 69년 중공은 6·25참전 대가로 백두산부근 2백50평방km의 우리땅을 북괴에 요구하여 총격전까지 있었고 65년에도 이같은 요구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고있는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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