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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근량 통신원 한국인 운전 수송대 동승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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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 옛날 「이맘」이라는 사도가 포교를 시작하면서 항구가 되었다는 「반다르아바스」는 낭만의 눈보다는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유명한 「페르샤」만의 무더위는 겨울인데도 쉬지 않고 섭씨35도를 상회하는 살인적인 것이었고 뒷골목의 풍경도 항구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이란」 국민이 앞으로 몇 년간 먹어도 없어지지 않을 만큼의 보리더미가 경탄마저 자아낸다.

<화물선 백50척이 외항에>
그뿐인가. 하역작업이 미치지 못해 외항에 그냥 떠있는 외국배가 1백50여척. 「이란」 국민을 먹여 살리는 항구답게 화물을 가득 싣고 가는 대형「트럭」들로 「반다르아바스」의 하늘은 온통 누런 먼지에 덮여 있었다.
뒷거리를 찾아보았다. 옥수수 줄기로 담을 두른 노동자의 집인 듯 허름한 동네에서는 「차트루」를 입은 여인네와 꼬마들이 공동수도에 모여 앉아 물을 긷고 있었고 그밖에 자동차정비공장·구멍가게 등이 화려한 「테헤란」의 「팔레비」 거리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있다.
「이란·탱커」346호가 다시 이르른 장소는 수입된 보리의 집하장. 때 마침 태양이 서쪽으로 뉘엿뉘엿 고개를 숙이는 저녁나절에 하늘을 짙게 뒤덮은 보리먼지 사이를 달리면서 다시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20t 싣는데 온종일 걸려>
모래사장인줄 알고 달리던 울퉁불퉁한 평야가 그대로 보리 노적장이 아닌가? 사방을 들러보니 둘레가 20여㎞쯤 그대로 산처럼 쌓여있으니 얼마나 많은 보리가 얼마나 높이 쌓여있는지 모른다.
현장감독의 설명마저 거의 주먹구구식이다. 이 보리만으로도 「이란」사람들이 앞으로 2,3년은 문제없고, 원산지가 어디냐는 질문에는 미국·「캐나다」·호주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한 뒤『아 참, 한국에서도 수입했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4천5백여리를 주파한 끝에 「반다르아바스」에 도착한 운전사들은 보리집하장에서도 또다시 힘겹게 일해야 한다. 「이란·탱커」의 운전사들은 바로 보리와 전쟁을 하는 것이다. 현지의 노무자들을 독려해서 「나일론」 부대에 담긴 보리를 하나 하나씩 실어 올려 20t을 채워야하는 일이 이만 저만 힘든 게 아니다.1분이라도 빨리 적재한 후 무게를 다는 검사장을 거쳐 숙소로 가야하는 운전사에게 노무자들의 늑장이 그토록 미울 수가 없다.
보릿자루 몇 개를 올려놓고는 쉬고, 운전사와 몇 마디 아귀다툼이라도 벌이게되면 아예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지 없어지고 만다.
이리저리 뛰어다닌 끝에 몇몇 사람을 찾아내도 담배 피우는 시간에 웬 변소는 그렇게 자주 들락거리는지 보리 한차 싣는데 하루 온종일이 걸리기 일쑤.
결국 「팁」이 적재속도와 정비례하게 된다는데 자기 스스로의 용돈마저 없는 형편인 운전사가「팁」을 줄 수가 없다. 「팁」에 인색하고 보면 적재속도가 늦고 때로는 독촉에 쫓기는 노무자들이 아예「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자세로 변해버린다.

<늦게 오면 잠자리도 없어>
이쯤 되면 운전사로서는 속수무책이다. 「알라」신은 「터번」을 두른「이란」사람만을 위해 줄뿐 한국운전사에게는 구세주가 아닌가보다.
짐을 다 실어 올린 다음은 운전사 혼자 짐 위에 대형「텐트」를 친다거나 쇠줄로 짐을 묶어두어야되기 때문에 약1시간동안 땀을 뻘뻘 흘려야 한다. 일이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검사장에서도 또다시 싸움이다. 만약 짐의 무게가 20t미만이면 회사측에서 짐을 더 실으라는 명령이고 20t이 초과되면 경찰이 운행정지를 명령한다.
1㎏도 틀림없는 20t을 만들자면 보리 집하장과 검사장을 어떤 때는 이틀간이나 오락가락하며 진땀을 빼야하기 r때문에 운전사들은 보리집하장과 검사장 사이를 일컬어 「눈물의 길」이라고 부른다.
꼭 20t을 적재한 후 차를 도로변에 놓아두되 피곤한 몸을 잠시라도 쉬어야하는「이란·탱커」의 「반다르아바스」 숙소는 「테헤란」의 숙소와 비슷한 피난민 촌락과도 같은 난장판이다.
2층 건물로 된 숙소는 방이 11개, 침대가 35개. 자기 방이나 침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다. 늦게 도착한 운전사들은 잘 자리가 없어 남의 자리에 끼어 들어야하며, 침대가 6개있는 가장 큰방은 들락거리는 사람, 식사를 준비 중이거나 세탁에 열중하는 사람들로 마치 피난민 수용소를 연상케 한다.
화장실도 단하나 뿐이다. 하루 온종일 그 앞에는 장사진을 이룬다. 식당이 없기 때문에 숙소에서부터 도로변, 또는 주차장 근처 아무데서나 밥을 짓는 광경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만은 운전사들의 몸이 「페르샤」만의 남단에 있건만 마음만은 서울과 통한다. 기나긴 사연인 듯 먼지를 쓰는 사람, 흘러간 옛 노랫가락에 눈을 지그시 감고있는 사람, 그리고 잡담을 주고받는 사람 모두가 고국을 주제로 움직인다.
집이 서울 영등포에 있다는 고제석씨(38)는 첫딸 순이양(16)에게 편지를 쓰다가는 『할말이 없군』하면서 편지를 찢어버린다.
그런가 하면 이근수씨(44)는 딸 윤선양(11)의 사진을 꺼내들고 명상에 잠겨있고 윤태흥씨 (27)는 어머니가 보고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알라」신은 「이란」인편>
「테헤란」으로부터 「반다르아바스」에 이르는 1천8백㎞ 3박4일의 동승은 이렇게 끝났다. 처음 운전사들의 충고대로 「코람샤」같은 짧고 쉬운 「코스」를 가지 않고 일부러 최난 「코스」를 달려봄으로써 우리 운전사들이 겪고있는 고생을 철저히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벌써 정이든 최씨, 그리고 많은 우리운전사들을 뒤에 두고 30시간을 달리는 「테헤란」 행 시외 「버스」 속에 다시 몸을 실은 기자는 현재의 조건과 같은 「이란」 진출이라면 문제가 많이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일단 우리운전사들의 수준이 인정받고 있는 이상 당분간 파견을 보류한다면 앞으로의 취업여건이 상당히 향상될 것에 틀림없다. 그러나 기술자의 파견 과정에서 지나친「덤핑」행위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현재와 같은 운전사의 고생은 그냥 계속될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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