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사후의 중공|군벌 분열설은 단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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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택동이 죽은 뒤 중공이 『서로 다투는 적대적인 군벌들의 영지』로 다시 분열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1920년대의 군벌 할거를 전례로 삼고 있기는 하나 20년대 이전과 그 이후에 작용해 온 역사적 동력을 간과한 흠이 있다. 최근 중공의 공자 비판 운동이 2400년을 거슬러 올라갔듯이 l920년대의 훨씬 이전에서 역사적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중국의 후계자 문제는 두 가지 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혁신을 강조하는 길이다.
장기적인 전통적 관점에서 볼 때 1368년 명나라 건국 이후 중국의 최고 권력 지배자는 30명쯤으로 1644년까지 명나라의 황제 17명, 1912년까지 청조의 황제 10명과 섭정들, 그리고 그 다음이 원세개·장개석 및 모택동이다. 이들의 평균 집권기간은 20년이다. 거의 예외 없이 이 지배자들은 죽을 때까지 권좌에 앉아 있었다.
이 같은 노인 정치의 전통은 경로 사상과 같은 기본적인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개인적인 관계처럼 맺어져 있는 제도적 요인에 의해 육성되어 왔다. 그러니 모택동과 주은내가 끝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 전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중국이 겪어 온 지배자의 승계 과정은 대부분 저항을 수반하지 않는 순탄한 것이었으며 새로운 지배자는 폭력 없이 권력을 계승했고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을 받았다.
명의 3대 황제가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탈취했고 청의 3대 황제도 수명의 형제를 감옥에 넣어 살해하는 등 같은 짓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1644년 청이 명으로부터 제위를 넘겨받을 때조차도 그 당시 세대마다 으례 일어나던 「유럽」에서의 왕위 계승 투쟁에 비해 훨씬 작은 폭력을 수반했었다. 20세기 전반 중국의 정치적 공백기간에 중국에는 군벌주의가 횡행했으나 중국은 비교적 최소한의 유혈 희생을 치르면서 역사상 최대의 혁명을 이루었다.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인상깊은 사실은 중국인이 군벌주의를 혐오하고 중국의 통일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은 내란이 없고 침략이 없는 태평 시대를 뜻했기 때문이다. 1949년이래 중국인만큼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맛본 국민도 없다. 이처럼 거대한 변화가 대중 민족주의라는 중국의 새로운 정신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라는 서구식의 개념은 서구 문명이라는 대단위의 하위에 존재하는 소단위를 부르기 위해 「유럽」에서 만들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중공을 방문한 수많은 미국인들이 알아냈듯이 그곳에는 미국인의 경험과 이해를 초월한 어떤 것이 있다. 세계 속의 세계인 중국의 통일은 종교적인 신앙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위협하다가는 재앙을 맞게 마련이다.
중국의 통일은 앞으로도 중국의 가장 우선적인 정치적 이상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알맞을 것 같다. 이것이 중공과 국부 양측에서 다같이 대만을 『중국의 일부』라고 부르고 미국 정부 역시 그렇게 부르는 주요한 이유다. 모 이후 정치적인 내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분열을 억제할 것이라는 추론이 여기서 연유된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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