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효|내가 바라는 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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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오늘날 「효」에 대한 관건은 저마다 구구하다. 「효」를「덕성」의 표현 아닌 「덕목」만의 표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오늘을 함께 살고있는 우리사회의 원로들은 어떤 효를 기대하고 있는지 권중휘박사와 김갑순교수의 의견을 들어 본다.
요즘은 부모에게 담배불을 켜드린다든가, 생신에 과일 몇개 사드리면 효도한다고 친구들의 놀림을 받는 예가 있다. 이런 일이 이상하다거나 격에 맞지 않다든가 일반 풍조와는 다르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듯 하다.
효도란말 자체가 시속적인 어휘가 아니고 고색이 스며있는 상투나 미투리같은 말처럼 들리는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은 모두 효자·효손이었던가하면 그렇지도 않은가한다. 물론 그때는 효도의 기준이 높아서 부모를 봉양하고 그 명령에 따르고 혼 정신성을 하고 병환에 시탕을 하고 돌아가시면 삼년 거상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참말로 부모를 이해하고 정을 갖고 대하며 그 장점에 의해 경의를 요하고 부모에 실수가 없게 간하기도하고 직접적으로 시정을 원하는 참된 정성이 있기도 했다. 그것도 남이 칭송할 만큼 되자면 모범이 될만한 뚜렷한 것이어야 했다.
오늘은 사회가 예와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인성이나 인간관계가 그동안 크게 달라졌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관이 달라졌을 뿐이다. 남의 이목이나 찬사를 위해 행동을 조절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언동이 달라졌다. 부모를 위하는 행동이 쑥스럽고 「저의 생활」, 「저의 출세」, 「저의 명예」가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측은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최고의 것으로 받들고 옛것은 달갑지 못한 인습으로 여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부모에 정을 쓸줄 모른다든가 자기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분을 차마 무시·박대하지 못하는 심성은 아직 얼마간 남아있다고 봐야 할듯하다.
우리들 문화전통처럼 자손과 후진양성에 깊은 뜻을 두고있는 곳에서 부모자식의 관계가 아주 단절에 가깝게 되지는 않은가 한다. 효행이나 효도란 말을 쓰지 않더라도 미덥고 다정하고 이해성 있는 관계가 맺어진다면 진정 아름다운것임에 틀림없겠다.
옛 사람들의 말에 양반이 부모상을 당했을 경우 3년 동안 베옷을 벗지도 빨지도 않고 입어야 효도하는 자손이라고했다.
이것은 그리 옛말도 아닌 50여년전 우리 시백부님도 그렇게 하시었다. 현대인들은 아마도 픽 웃어넘길 효도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은 오륜 삼강이 너무나도 타락되고, 특히 효에 있어서 요즈음 젊은이들은 효도는커녕 거의 다 불효라고 개탄하는 이가 많다.
50∼60대들 중 많은 수는 아예 자식의 효도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것도 같다. 나도 그 부류에 속하는 한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직도 오륜삼강의 형식을 그대로 굳혀서 생각하는 일종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다. 입으로야 『세대가 달라졌는데 자식들이 옛날같이 하기를 바라겠느냐』고 하지만, 사실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소홀했을때 그 섭섭해하는 모양은 처참하기까지 한 경우도 가끔 본다.
결국 모든 인간관계는 기본적인 자세와 근본정신만을 평가한다면 절대로 문제가 될것이 없다고 믿는다.
효에 있어서도 그 형태가 다를뿐 자식이 부모에게 향한 정과 감사함이 다를수 없다. 그 기본이 흔들리지 않은것을 너무 야단스럽게 큰일이 난것처럼 떠들어대는것은 낭비일뿐이다.
오히려 부모 자식의 관계가 솔직담백하면서 간격이 없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의 정을 주고 받는것이 진정한 부모의 애정이며 자식의 효도가 된는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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