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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3)|<제자·이철승>|전국학련<제 47화>나의 학생운동-이철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빗나간 패기>
47년 10월 18일-.
맑게 갠 가을하늘 아래 서울운동장은 고·연대 학생들의 뜨거운 함성이 메아리쳤다.
전국체육대회 축구부문 연대와 고대가 결승을 벌이는 날이어서 재학생들은 물론 졸업생까지 총동원되어 용호상박전을 벌였다. 양교는 유감없이 교세를 떨쳤다.
『입실렌 체이호 카시캐시 캐시코』 고대가 우렁차게 교호를 외치면 연대도 우렁차게 교호를 외쳤다. 『아카라카 칭칭 초초초…』.
이렇게 연대와 고대가 일대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난데없이 일군의 불청객이 나타났다.
5백여명의 서울 상대생들이 운동장에 밀려들었다. 그들은 연대 측을 응원하면서 고대 측에 심한 야유를 보냈다.
그런 가운데 응원은 열도를 더해가 연대의 우렁찬 「브라스·밴드」와 고대의 요란한 농악소리가 뒤범벅이 됐다. 왜 상대는 연대에 가세했는가.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날 상대와 고대의 럭비결승전 때의 일. 상대는 전교생이 총동원되어 응원을 보냈다. 상대는 불과 50여명만 나가 응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고대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게임」에 지자 흥분한 상대생들은 이덕원(고대응원부 단장)등 고대생 수명을 잡아다 두들겨줬다.
이 소식은 그 이튿날 고대에 쫙 퍼졌다. 전교생이 총동원돼 서울운동장에 나갔다. 마침 그때는 서울상대와 약대가 야구결승을 벌이고 있었고 고대생들은 약대를 응원했다. 전날의 화풀이를 응원으로 보복했던 것이다.
이에 분격한 상대생들이 이젠 축구장으로 몰려와 연대를 응원했다.
연쇄적인 응원 파동이었다. 고대는 약이 올랐지만 징·북·꽹과리를 두들겨대며 기세를 올렸다.
연대는 상대와 합쳐 더욱 기염을 토했다. 고대의 주전 「멤버」는 이병우(체육회 간사) 홍덕영(국제심판) 이기주(페리호 부장), 연대의 주전「멤버」는 장경환(국제「코치」) 최의중 박건섭(이상 실업인)-.
그러나 이젠 축구시합보다도 완전히 응원싸움이 됐다.
선수들도 「와일드·차징」이 속출했다. 이때 심판시비가 났다. 「태클」을 당한 고대 측에 심판이 「프리·킥」을 선언한 것.
응원석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집어치워라, 무효다, 우우-』소리와 함께 방석·유리병 등속이 수없이 운동장으로 날았다.
순식간에 경기장은 완전히 수라장이 됐다. 이때만 해도 서울운동장은 판자 울타리였다. 양측은 울타리 각목을 빼들고 경기장 중앙선을 돌파해 서로 치고 팼다.
처절한 백병전이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 이 난투극은 수도청 경비계장 이정석씨(전 국회의원)가 5대의 경찰「트럭」을 동원해 가지고 달려와 가까스로 진압됐다. 그러나 피아간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고대 측은 강선규(전 국회의원)의 이(치)가 몽땅 빠지고, 그 외 부상이 22명, 연대·상대 연합군은 38명의 부상자를 냈다.
부상자는 모두 시민병원(현 메디컬·센터)에 입원했다.
이렇게 해서 집단 난투극은 일단 무마되는 듯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다음 월요일에 터졌다. 고대생 전원이 상대에 몰려가 기물을 파괴하는 등 휩쓸어버린 것이다.
본래 서울운동장 불상사는 젊은 학생들의 애교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또 다른 이유가 없지 않았다.
그것은 상대와 연대의 연대감-.
상대에서는 국대안 파동때 좌익 축구선수들이 대거 몰려났다. 그들은 곧 『타도 고대!』를 외치는 연대에 들어가 연대축구의 핵심을 이뤘다.
따라서 상대는 고대에 『때리는 남편 보다 말리는 시누이』격이 됐다.
게다가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 강하영이란 자가 헐레벌떡 나타나 『지금 성동역에서 상대생들이 고대생을 납치해 갔다』고 불을 질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강은 고대생 아닌 좌익 「프락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한 학생들은 순식간에 흥분했다.
『가자! 상대로 가자!』 고대생은 모두 들고일어나 약 1㎞떨어진 상대로 갔다.
총지휘 조병후 이덕현·박철용, 본부군은 윤주영 정규헌 황천성 유구항 등 체육부원들, 중군은 정법대학, 좌군은 경상대학, 우군은 문과대학 도합 4개군 8백여명이 진격했다.
본군 중군은 정문으로, 좌군은 미아리쪽에서 산을 넘어, 우군은 제기천을 건너 뒷담으로 포위작전을 펴며 육박했다.
상대는 발칵 뒤집혔다. 전교생이 강의를 중단하고 운동장에 나와 방어선을 쳤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4개 군의 공략에 쉽게 무너졌다.
상대생들은 모두 후퇴해 교사안으로 들어가 「바리케이드」를 쳤다.
「바리케이트」란 책상과 의자로 2층 계단을 막는 방법.
고대생들은 상대 뒤뜰에 야적한 월동용 장작개비로 유리창을 모조리 부쉈다. 이 통에 박용하 학장과 정내길 교수가 부상을 하고 「바리케이트」도 끝내는 무너져 치고 패는 난투극이 벌어져 수많은 학생이 부상했다.
참으로 끔찍한 대난동이었다. 나는 그날 학련본부에 들렀다 늦게야 학교에 갔다. 어쩐지 학교가 텅 비어 알아보니 대부대가 상대로 습격나간 뒤였다.
난감했다. 고대학생 위원장 자격으로 보나 전국학련 위원장 자격으로 보나 큰 낭패였다.
더우기 학련감찰위원장 조병후 동지가 총지휘했다니 이는 곧 학련의 책임이 아닌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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