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학련<제47화>-나의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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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북학련의 활동>10·1폭동의 여파는 삽시간에 번져갔다. 그땐 마침 호열자가 만연되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천하던 때라 공산만행은 더욱 기세를 폈다.
대구 영천 군위 왜관 성주선산 경주 의성등의 경찰서가 좌익폭도들에 접수되고 멀리전라도 충청도에 이르기까지 좌익의 만행은 확대됐다.
그중에서도 영천이 가장 격렬했다.
경찰서·군청, 우체국·등기소등은 모조리 불타고 군수를 비롯 수많은 경찰들이 길바닥에서, 총살당했다.
정도영(제헌의윈) 이활(고대재단이사장)씨등 민족진영인사들의 집은 모조리 불타고 보규창(재미·실업인)씨의 숙부묘수환씨는 무참히 살해됐다.
그러나 좌익이 휩쓸고간 거리에서 우익은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태영(대구농·한국사회사업대학장) 황운해(대공·영천학련의원장) 문순구(대농) 한형수(현국립공보원장) 조규창등은 10월폭동의 여파속에서 영천학련을 결성, 대공투쟁에 나섰다.
영천학련이 결성된후 영천지구는 「학련신분증」이 없으면 통행을 못할정도로 학련이 드세었다. 군·경과 합동하여 보현산공산 「게릴라」를 소탕하며 공비인 배진두등을 귀순시키는등 사장선도에도 힘썼다. 안동 역시 해방후 좌익이 억셌던곳.
안동농림학교에선 국어교사인 계병철(시인 월북)이 수업시간에 토지개혁과 무상분배론을 주장하며 「아버지 동무」의 뜻을 역설할 정도.
그러나 46년4월부터는 신현수(안동학련위원장·육군소장)동지를 중심으로 조종석(안농) 김태간 김규봉등이 김영욱동지(교사)의 지도로 안동학련을 결성, 좌익과 대결했다.
이럴즈음 안동농림학교에 권령기교장이 부임해서 좌익 극렬학생 l백50여명을 무더기 퇴학시킴으로써 안동학련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그는 빨갱이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리하여 부임하자마자 빨간 학교지붕을 검은색으로 바꾸고 교내에 서있는 빨간 단풍나무도 모조리 베어버렸다.
경북 서북에 위치한 금천은 상주 문경 예천으로 통하는 교통의 길목.
자연 좌익의 발호가 심했지만, 김승환위원장은 이황재 백준기 박내억 심경섭(이상 금천중) 박용섭 (상주농) 동과 역전릉에 학련회관을 짓고 기차봉학생들에 대한 반공 반탁정신을 고취했다.
언젠가 3·1절 행사때는 당시 금천중 지리교사 정모가 좌익 학생들과 사제폭탄을 만들어 김천형무소를 폭파하기 직전 사전에 급습, 일망타진한 일도 있다.
포항역시 항구도시답게 좌익세가 강했던 지역.
49년1월1일엔 당시 학련간부 김진영(포항중)이 영일군오어사부근에서 좌익한테 학살을 당했다.
그런데 공산당은 얼마나 잔인한지 김동지가 학련간부라는것을 알자 그들은 죽은 시체까지 고기썰듯 새토막으로 잘라버렸다.
이같은 공산만행은 도내 곳곳에 만연되어 경주에서는 정연일(파수업) 이상연(현신민당위원장)등이, 형주에서는 김창근(전국회의원)등이 지방학련을 결성, 대공투쟁에 나섰다.
이와같이 10·1폭동은 역으로 경북일원에 막강한 학련조직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좌익 또한 만만치 않았다. 10·1폭동후 패주한 공산당은 운문산 보하산등에 숨어들어 남한 최초의 「빨치산」이 되는가 하면 소위 「6연대사건」을 유발, 군대의 폭동을 획책했다.
당시 대구의대를 중심으로 한 좌익학생들도 지하에 잠복, 활동을 계속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라이터」가 처음 나오던때.
좌익세포는 꼭 「라이터」를 갖고 다녔다. 상대방이 기밀문서를 『봤다!』하면 즉시 태워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경북학생운동에 가장방해가 됐던것은 좌익 기관지 민성일보였다.
구도청 앞에 자리잡은 민성일보는 항상 학교 맹휴와 공장파업을 선동하는 좌익의 전위대였다.
경북학련은 47년5월 박배근(치안본부 경비과장) 김일용(제2대위원장·사망) 손문창(제3대위원장·전매청제조국장) 이용택(도연맹감찰부장)등 60여명이 민성일보를 폭파, 좌익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해 10월엔, 민전이 대구시공회당에서 「남노당창당기념 세계인권옹호기념웅변대회」라는 간판을 걸고 시민을 선동하자 이를 습격해 좌절시켰다. 대륜중학에서는 좌익학생과 좌익교사가 합동으로 맹휴를 획책하자 손문창등 학련간부들이 이를 분쇄하여 학원의 정상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자금조달이 항상문제였다.
당시 학련은 누구나 「자기밥」먹고 뛰었고 박배량동지등은 학교 등록금까지 털어 바치는 열성분자였지만 자금조달이 어려웠다.
할수없이 경북학련은 극단을 만들어 연극공연을 했다.「영남루의 아랑」「민족의 설움」이라는 두 연극은 대구시 만경관에서 공연돼 그런대로 수입도 많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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