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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차르, 크림 합병 연설 … 30차례 기립박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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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크림자치공화국 대표들과 함께 18일 러시아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크림공화국과 세바스토폴 특별시의 러시아 귀속을 결정하는 협정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왼쪽 앞은 세르게이 악쇼노프 크림공화국 총리, 오른쪽은 알렉세이 찰리 세바스토폴 시장이다. [모스크바 로이터=뉴스1]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신속하고 완강했다. 40분간 이어진 격정적인 연설에서 그는 크림 합병의 합법성을 주장하고 서방 제재에 대한 보복을 예고했으며 우크라이나 다른 지역에 대한 추가 개입은 없을 거라고 선언했다. 정당성·보복·타협의 수사(修辭)로 30여 차례 기립박수를 받았다. 일부 여성 의원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21세기 차르’가 꿈꿔 온 유라시아 제국의 작은 자축식 같았다.

 18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상하 양원 의원들을 상대로 이뤄진 푸틴의 연설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공식 인증이다. 16일 크림 주민투표 이후 불과 이틀 만에 전광석화처럼 연방 합류 협정이 진행됐다. 남아 있는 의회 절차는 시간 문제에 불과하다. 이로써 지난달 27일 크림반도 심페로폴과 세바스토폴 공항 무력 점거로 시작된 러시아의 크림반도 접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연방 합류로 마무리하게 됐다.

 푸틴은 연설에서 서방 제재 따위는 개의치 않는 ‘강한 러시아’를 과시했다. 오히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이중 기준을 들이대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 등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개입해 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 것을 예로 들었다. “미국이 이끌고 있는 나라들이 국제법이 아니라 ‘총의 규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땐 의원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푸틴은 크림자치공화국의 러시아 연방 합류가 크림인의 자결에 따라 이뤄졌음을 강조했다. “크림인들 스스로가 러시아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과도정부가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폐기하는 법안을 추진함으로써 러시아계 권리를 위협했고 서방 파트너와 손잡은 과도정부가 우크라이나의 혼란을 가져왔다고 비난했다.

 특히 공을 들인 부분은 크림반도의 역사성이다. “크림은 러시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부”라며 오랫동안 러시아 영토였던 크림반도가 소련 붕괴 당시 우크라이나에 귀속된 것이 “역사적인 불의”였다고 했다. 대신 우크라이나 다른 지역에 개입하진 않겠다는 것도 분명히 했다. 국제사회가 크림 합병을 눈감아 준다면 더이상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푸틴은 “서방과 대립할 생각은 없지만 러시아의 국익을 지키겠다”는 발언을 덧붙였다.

 러시아의 합병 행보에 국제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폴란드를 방문 중인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노골적인 국제법 위반”이라며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도 “보다 강력한 제재가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외무장관 명의로 “러시아가 문명 세계와 국제 안보에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생생히 보여줬다”며 “합병 협정은 민주주의나 상식과 거리가 멀다”고 비난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연합(EU)은 이번 주 내 추가 제재를 내놓을 전망이다.

 앞서 미국과 EU는 17일 각각 11명과 21명의 제재 명단을 발표했다. 그러나 ‘냉전 이후 가장 광범위한 제재’라는 백악관의 의미 부여와 달리 “이빨 빠진”(영국 일간지 가디언) 제재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푸틴 등 사태의 핵심 인물이 제재 대상에서 빠진 채 “중간급만 겨냥한 상징적인 제재”(군사전문지 스트랫포)에 그쳤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제재가 ‘오바마는 맞대응할 만한 맷집이 없다’는 푸틴의 시각을 재확인시켰다”고 썼다. 이 같은 평가를 반영하듯 모스크바 주가지수(RTS)는 17일 2.73% 상승했다. 약세를 보였던 루블화 가치도 달러 대비 0.8% 올랐고, 러시아 정부 국채 금리는 하락했다. 18일 다시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긴 했지만 일시적인 변동일 뿐 시장에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추가 제재를 경고하긴 하지만 국제사회로선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앞선 제재가 예상보다 강도가 약했던 것은 ‘이에는 이’ 식의 푸틴 대응을 우려한 것이었다. 추가 협상 여지를 남겨놓은 조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에서 물리적 충돌을 피하면서 국제사회의 경고를 전달할 묘수를 찾아야 할 형편이다.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신냉전’이 전개된다면 시리아 사태는 물론 이란·북한 핵협상 등에 줄줄이 적신호가 켜진다. 당장 18일 재개된 P5+1(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독일)과 이란과의 핵협상이 문제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를 포함한 협상 대상국이 옥신각신할수록 이란이 협상 테이블에서 느슨하게 나올 것”이라는 우려를 전했다. 

강혜란·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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