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배정 진학제의 재 검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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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 시내 등 일부 고교에서 추첨 배정 방식에 의한 진학 제도를 실시한 이후 입학한 학생 가운데 성적이 지진한 학생들을 자진 퇴교 또는 가 진급시키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한다.
현재까지는 이화여고에서 24명, 중앙고에서 15명의 자퇴 및 1백61명의 가 진급 사실만이 밝혀졌으나 이와 같은 사례는 비단 서울 시내 일부 학교뿐만 아니라 부산·대구·인천·광주 등 같은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많은 학교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듯 하다.
문교부는 이 사태에 대해 즉각 철회를 시달하고 지진아들에게 대한 학과별 특수 지도 등 적절한 지도 방안을 강구하도록 촉구했다고 한다.
당국의 이 같은 지시는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이들 고교의 입학생들이 모두 연합 선발 고사에 합격했고 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학교가 배정되었으므로 학교장이 학생들의 성적 불량 또는 저 지능을 이유로 마음대로 퇴교시켜 학생의 피교육권을 박탈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해당 학생의 처지에서 볼때에도 이 같은 일련의 조치는 배움을 받겠다는 의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 일뿐더러 자퇴에 의한 학교 선택의 길이 전혀 막혀 있는 오늘의 실정하에서는 부당한 것이라고 항거할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한편 학습 지진아의 문제를 학교 교육의 효과면이나 그 해당자 개인의 인격 보호라는 점에 맞추어 생각하면 일부 고교의 그 같은 조치를 교육적으로 나무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객관적으로 고교 교과 과정의 이수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지진아들은 다른 학생들의 학습 진도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낭비함으로써 불식 간에 열등감과 좌절감 속에 떨어져 결국 문제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교나 중학교 과정이라면 또 몰라도 비교적 높은 지능이 필요되는 고교 교육 과정의 학습 지진아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문제의 시발점은 애당초 그에 상응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른바 평준화 정책을 실시했을 때부터 비롯되었다. 중학교의 추첨 입학제 실시 이후 국민학교 과정에서부터 지적 격차가 무시된 교육이 행해지는 경향이 일어났던 것인데, 이때 이미 그 부작용 문제는 크게 논의된바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중학 교육이 의무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고, 심신 발달의 과정상 웬만한 격차가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 때문에 그런대로 수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74년에 서울을 비롯한 5개 대도시 고교에 새 입시 제도가 실시되면서 학습 지진아 문제는 극복하기 어려운 곤란성을 예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학의 운영난이나 학교마다의 전통 단절, 애교심과 학습 의욕의 저하와 같은 문제와 함께 새 제도가 고등학교 과정에서까지 경쟁적으로 공부하는 기풍을 저해하고 모든 학교의 저질로의 평준화를 가져올 결함을 내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년배의 국민 중 단지 7% 남짓만이 혜택을 받게 되는 고교 교육이 그렇게 흔한 것도, 쉬운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평준화의 명분」은 애당초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평준화다, 무시험이다 하는 것은 어린 국민들의 수험 준비를 위한 과장한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좋은 뜻에서 나은 발상이자, 제도이지만 그 같은 호의적 배려에 수반되어야 할 재정 문제 등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음이 밝혀진 이상 이 같은 무리한 정책은 이제 하루 빨리 철회되어야 할 단계에 왔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하겠다.
무리한 과보호의 제도가 비합리적이고 또 무익한 것이라는 것은 지난 수년의 경험으로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분명해졌다.
이 제도의 전국적 확대 방침을 보류하고 있는 현 문교 당국의 인식도 이 같은데 있다고 믿는 우리는 이제 당국이 구차스런 명분에 구애됨이 없이 입시 제도 같은 학교고유의 기능은 학교 당국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본다. 불합리한 제도의 고수로 선량한 개인이 희생되는 일이 자주 생겨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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