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로프」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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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매주 화요일 아침이면 훤칠한 키에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거의 벗겨진 한 사나이가 집을 나선다. 그는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보내주는 운전사가 달린「리무진」을 타고 세계적으로 유명한「레베데프」연구소에 나가는 것이다. 양자론과 소립자론에 관한「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사나이가 「안드레이·디미트리에비치·사하로프」의 모습이다.
그가 살고 있는「모스크바」의 「아파트」가에서도 그가 누군지를 잘 모른다. 그러나 그처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소련인도 드물다. 1921년에 태어난 그는 22세에 교수가 되고, 26세에 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29세에 수소 폭탄 실험의 실마리를 풀었다. 32세에는 최연소의 과학 「아카데미」회원이 되고, 50년대 전반에 걸친 핵분열의 이론적 업적으로 『소련 수폭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그후 그에게는 온갖 상과 영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스탈린」상·영웅칭호, 그리고 8개 대학의 교수직, 소련 최고의 영예를 나타내는 금성장….
이처럼 영광 속에 묻혀 살던 그는 68년에『진보·평화 공존 및 지적자유』라는 책을 내놓았을 때부터 반체제의 투사로 탈바꿈한다.
이 때부터 온갖 특권과 호강을 버리고 인류와 동포를 위하여 정의와 진실을 찾아 권력과 대결하는 수난자가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소련 정부도 「사하로프」의 목을 죄어 매기 시작했다.
그의 딸은「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되고 그의 부인은 소아과 의를 반 타의로 그만두게 됐다.
그 자신도 「정신병원감옥」에 수용하겠다는 위협을 수차에 걸쳐 받았다. 이런 속에서도 자유와 정의를 위한 그의 투쟁은 가열되기만 했다. 그의 항로는 소련 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억압된 흑인들을 위한 성명, 중우 문화에 대한 비판, 미국의 월남 개책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번졌다.
생물학을 「메도베데프」가 정신 병원에 구류되었을 때는 회의실 칠판에 백묵으로 항의「메시지」를 쓰기도 했다.
「솔제니친」도 쫓겨난 지금, 소련에서는 「사하로프」는 반체제의 가장 힘찬 구심점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그는 자기 투쟁이 이기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다. 그럼 왜 싸우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그는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정치투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모럴」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단순한 비관주의 자가 아니다. 『나는 타고난 낙관 주의자다. 다만 상황의 객관적인 분석이 비관적으로 보일 뿐이다.
금년도 「노벨」평화상은 「사하로프」박사에게로 돌아갔다. 과학자로서 평화상을 받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하로프」자신으로서는 이번 평화상을 통해서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라 서민, 참다운 인간들 속에 많은 벗들, 따뜻한 벗들』을 더 많이 얻게 된 것이 가장 기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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