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6)제47화 전국학련(6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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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때 나의 뇌리에 번개처럼 한가지 꾀가 생각났다.
『슐레브(미CIC요원)는 필시 내 얼굴을 모른다. 억지를 써보자』―이렇게 결심했다. 나는 『당신이 누군데 나더러 이철승이라고 하느냐』며 시치밀 뗐다.
그러나 「슐레브」는 아무래도 수상쩍다는듯 송동지더러 『이철승이가 틀림없지, 없지』하며 다그쳐 물었다.
그때서야 송동지는 나의 눈치를 채고 매우 쑥스러운 표경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모호하기 이를데 없는 표정이었다.
한참동안 승강이 하다가 결국 나는 차에 실렸다.
인촌댁에 가서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순간 눈치빠른 이승철군은 잽싸게 자취를 감췄다. 인촌댁으로 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시간을 벌 셈으로 인촌댁을 잘 모르는 듯 원서동 여운형씨댁 쪽을 돌아 이골목 저골목으로 차를 몰게 했다.
「슐레브」는 『뭐 이래, 뭐이래』하면서 짜증을 냈다. 한참후에야 인촌댁에 당도했다.
인촌의 사모님이 나왔다. 「슐레브」는 공손히 인사를 드린후 『이학생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이아주여사는 승철이의 전갈이 없었더라도 내 표정만으로도 사태를 짐작하실분.
퉁명스럽게 『모르는 학생이요, 왜 그러나요?』 오히려 반문했다.
그러나 「슐레브」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수상쩍다는듯 나를 또다시 차에 태우더니 안국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들의 사무실로 데려가는 눈치였다. 나는 슬그머니 안주머니 속의 학생증이며 명함따위를 손장갑(그때는 추운 겨울이라 장갑을 끼고 다녔다) 속에 넣어 살짝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손가방.
해방후부터 줄곧 들고 다니는 나의 기름때 묻은 손가방속엔 온갖 학련관계 문서·책·「노트」는 물론 동가식서가숙 신세에 필요한 양말이며 세면도구등도 들어있었다.
얼마간의 자금도 감추어져 이동식 금고기 때문에 밖으로 던질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면서 결국 나는 청진동 해장국 골목입구에 있는 미 CIC본부(구자유당사·현서울농협본소)로 끌려 왔다.
심문이 시작 됐다.
『이철승이지?』『아니요?』가 반복됐다.
취제관은 「미스터·웨디카」, 그는 「슐레브」의 상관으로 훗날 4·19이후 장면총리의 정치고문을 지냈고 5·16후에는 그의 본국인 미국으로 가서 그곳서 망명생활을 하는 나에게 큰 위로의 친구가 됐던 사람.
그는 한국말도 잘했고 한국인부인(이대출신)을 가진 친한 인사다.
그러나 당시는 돗수높은 안경에 인상까지 매서운 철저한 CIC요원.
아니라 다를까 「웨디카」는 나의 손가방을 뺏더니 그 속에 든 1·18기념행사 계획서며 내 이름이 적힌 책·「노트」를 들이대면서 『이래도 이철승이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고 시인할 내가 아니었다. 뚝 잡아뗐다.
내가 구속되면 1·18기념행사는 좌절될 것 같았고 설사 구속된다 하더라도 저녁까지만 버티면 다른 동지들이 비밀리에 행사준비를 완료할 것이라 믿고 거짓말을 했다. 『사실 말이지 나는 이철승이의 친구 이철이다. 가회동에 사는데 오늘 아침새벽 철승이가 찾아와 자기는 지금 쫓기는 몸이니 이 가방을 맡아두라고 했다』―이렇게 억지소리로 둘러댔다.
「웨디카」는 『어림없는 수작말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반신반의하면서 드디어는 전날 잡혀온 5명의 우리 맹원을 불러다가 대질심문을 시작했다. 그들 5명을 문앞에 세워놓고 문틈으로 나를 보게한 다음 『저학생이 너희 위원장이지』―이렇게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웃지못할 촌극을 빚었다.
중학생 3명은 이철승이 틀림없다는 것이고 대학생 2명은 아니라고 했다.
결국 2대3이었지만 다수결로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어가는데 하오 4시쯤 나의 「자기부인극」은 들통나고 말았다.
당시 장택상 수도청장의 직계부하인 최운하사찰과장이 「웨디카」방에 들어왔다.
그는 직책장 미군CIC에 자주 출입하는 사람인데 이날 우연히 「웨디카」 방에 들렀다가 나를 보자 『아니? 이위원장, 여긴 웬일이요?』하며 깜짝 반겼다.
나는 눈짓을 하며 고개를 돌려도 그는 더욱 반기며 웬일이냐고 되물었다.
옴싹달싹 할수 없게 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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