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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전국학연(64)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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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대안문제가 터진후 또 하나 민족진영학생「서클」이 서울대학교 중심으로 발족했다. 주동 인물의 다수는 전국학련의 발기인이었거나 간부맹원이었다.
면학분위기 조성을 목표로 「건설」이라는 이름을 딴 「건설학생회」가 바로 그것.
서울대학교 우익학생은 맹휴선풍이 가장 거세었던 47년2월8일, 회합을 갖고 맹휴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 모략을 분쇄하기 위해 건설학생회를 조직하자고 뜻을 모았다.
다음날인 9일 건설학생회 결성대회를 갖고 중단한 학업을 계속한다는 원칙아래 결의문과 성명서를 문교부 및 대학당국에 보냈다.
결의문은 『ⓛ국립대학의 미국인 행정관을 유능한 조선인으로 바꿀것 ②46년12월18일부의 군정장관명에 의한, 휴교령을 즉시 철회할것 ③교수진을 완비하고 그 생활을 보장하며 숙사설비를 충실히 할 것』등.
성명서도 『우리들은 현하의 제반사정으로 보아 제도의 불비와 설비의 불충분을 애국적 견지에서 관인하며 국립서울대학교 건설학생회를 결성, 조국의 학원을 구하고 순수한 학원을 건설하기를 성명한다』고 밝혔다.
당시 건설학생회의 주요「맴버」들은 반공과 면학정신이 투철하였던 「리더」들이어서 학원정상화에 크게 공헌했다. 그들의 면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문리대=윤천주·임원택·윤하선·서석순·오기형·이인세·전해종·박준규·이종후·채문식·엄규진·계훈제·김희만
▲법대=남일남·양재건·김봉환·조한원·김종일·김치선·전영춘·서재성·김병희·송충섭
▲상대=장예준·유호선·김재순·정송모·홍종철·이창옥·김재용·최찬영·현영원·주종건·주안국·홍성철·조규창·고재청·이화식
▲공대=오재일·차경모·김상철·이경호·박억섭
▲치대=김기혁·김노현
▲예대=김종순 건설학생회는 맹휴가 남노당의 지령에 의해 조직적으로 일어난 것임을 사회에 고발하기 위하여 「맹휴진상폭로 대회」도 개최했다.
47년2월13일 하오l시 서울 예배당에서는 1천여명의 학생 및 일반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맹휴는 학원적화에 고 목적이 있다. 파괴적 맹휴는 분쇄하자』는 결의 밑에 대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맹휴진상폭로대회」는 뜻밖의 일로 크게 고무됐다.
그것은 김두한동지의 대담하고 재치있는 행동 때문이었다.
그 당시 유진산선생이 이끌고 있던 「청총」의 임찰부장인 김두한동지와 「전국학련」의 중앙위의장이던 나는 거의 매일 연락하고 있던 터였다.
대회가 열리기전 나를 만난 김동지는 『철승동지! 좋은 수가 있어! 북노당의 지령이란 물적증거가 있으니 이를 폭로해서 좌익학생들의 국대안 반대소요의 기를 꺾어 놓읍시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폭로수법을 쓰기로 합의하고 대회장에 나갔다.
대회가 회순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을 순간 그는 청년단원을 거느리고 불쑥 장내로 들어왔다.
바로 사회석에 뚜벅뚜벅 걸어올라갔다. 그러고는 『내가 소련군정 당국이 보낸 국대안반대비밀지령문을 입수했소』하고 말하고 즉석연사로 단상에 섰다. 삽시간에 청중들의 눈길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어제 저녁 남노당 허헌의 집을 습격해서 집을 뒤졌더니 이런 것이 나옵디다.』 김동지는 이북의 소련군정당국이 허헌에게 보냈다는 비밀지령문을 높이 쳐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전략…국대안반대를 위해 남조선에 있는 모든 학교에서는 조직적으로 맹렬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혁명적 투쟁의 제1단계로 합법적으로 맹휴에 돌입해야 합니다』하는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이 지령문은 소련말과 한글로 씌어 있는데 소련놈의 「사인」이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원본이이요』하는 말까지 고 독특한 말투로 덧붙였다.
그러자 대회장은 삽시간에 소련규탄대회장으로 변해버렸다. 그 효과는 예상대로 1백% 적중했다.
서울대학교의 건설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원내의 맹휴수습성과는 점차로 다른 학교에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짧은기간(47년2월∼47년6월) 횡적연계작전상 「전국건설학생연맹」이 결성되기도 했다.
간부진은 위원장에 엄규진(서울대), 부위원장 김동흥(고대), 이동원(연대), 총무국장 채문식, 조직국장 조한원(법대), 선전국장 최찬영등으로 짜였다』「전국학련」과 「건설학련」은 한때 대립과 경합관계를 유지했지만 교내「서클」같은 규모로서 「전국학련」이 채 흡수 못한 학생을 상당히 규합하여 반공투쟁과 학원질서 회복을 위해 큰공로를 세웠다. 건설학련은 서울대학교의 질서가 잡히고 면학분위기가 되살아나면서 곧 4개월만에 해체됐다. 그 간부진도 대부분 「전국학련」에 복귀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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