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9월 30일, 전인대 상무위원장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은 평화통일에 관한 대륙의 방침을 내외에 천명했다. 모두 9개 조항이라 “葉九條”라고 불렀다. 타이완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告臺灣同胞書) 발표 후 33개월간 해외와 국내의 반응을 떠본 결과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65>
해외 여론은 “葉九條”에 긍정적이었다. “누가 봐도 타이완의 이익을 전제로 한 평화통일안”이라며 대륙 측의 성의를 깎아내리지 않았다.
7개월 후인 82년 4월, 장징궈(蔣經國)가 부친 장제스(蔣介石)를 추모하는 글을 발표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넘쳐났다. “부친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영혼이 고향에 있는 조상들과 함께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모든 이들의 효심이 민족의 정을 확산시키고, 민족을 경애하며, 국가에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장징궈의 글을 접한 중공의 타이완 공작소조 조장 덩잉차오(鄧潁楚·등영초)는 전인대 부위원장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를 불렀다. “장징궈는 속이 깊은 사람이다. 남편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생전에 칭찬을 많이 했다. 자세히 봐라. 이건 보통 내용이 아니다. 회답으로 간주해도 된다”며 장징궈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자고 건의했다. “장징궈에게 사사로운 형식의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중국 천지에 너밖에 없다.”
장징궈와 랴오청즈, 두 집안은 뿌리가 깊은 사이였다. 국민당 원훈이었던 랴오청즈의 아버지가 황푸(黃埔)군관학교 당 대표시절, 장징궈는 교장 아들이었다. 한 울타리 안에 살며 어찌나 친했던지 친형제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스크바에서도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나이는 랴오청즈가 두 살 위였다.
5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던 랴오청즈는 중국 고전에도 능했다. “내 동생 징궈(經國吾弟)”로 시작되는 천하의 명문 “장징궈 선생께 보내는 편지(致蔣經國先生信)”를 인민일보를 통해 만천하에 공개했다.
랴오청즈는 장징궈에게 제3차 국공합작의 실현을 간곡히 호소했다. “타이완은 언젠가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골육이 분리된 동포들의 애통함을 동생이 아니면 누가 풀어 주겠는가. 통일은 빠를수록 좋다. 이 위업을 동생이 실현해야 한다. 아태지구와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길이다. 우리는 만나서 한 번 씩하고 웃으면 모든 원한이 풀리는 사이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자. 내 동생이 세인의 추앙을 받고, 이름이 청사에 빛나기를 나는 소망한다.”
훗날, 랴오청즈의 편지를 읽은 장징궈의 반응을 측근들이 구술로 남겼다.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돋보기를 낀 총통은 신문에 실린 랴오청즈의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읽고 또 읽었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그간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토해내는 것 같았다. 모두가 역사의 죄인, 얼굴 마주하고 한 번 웃으면 모든 원한이 풀리는 사이라는 말에 심장이 뛰는 듯했다. 총통은 온갖 신산을 다 겪은 사람이다. 몇십 년 만에, 다른 사람도 아닌 랴오청즈의 글을 대하는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만 할 뿐이다.”
장징궈는 미동도 안 했다. 대신 미국에 머무르던 계모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 랴오청즈에게 보낸 답신을 공개했다. 랴오청즈의 편지에 쑹메이링의 안부를 묻는 대목이 있다 보니 명분이 있었다.
쑹메이링은 문혁시절 화를 당한 “내 조카 랴오청즈”의 안부를 물으며 공산당에 맹폭을 가했다. “중화민국은 국민정부 집권 이래 국부(孫文)의 사상과 애국정신을 저버린 적이 없다. 정의감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은 같은 종족인 마르크스를 내동댕이쳤다. 공산당은 같은 민족에게 폐족(廢族)당한 사람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들며,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중화민족을 훈련시킨다. 대륙을 대표한다는 문호 궈뭐뤄(郭沫若·곽말약) 시에서 스탈린이 나의 아버지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치욕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3일간 구토를 해도 그치지가 않았다.”<계속>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