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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가는 서울, 살롱을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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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청백리가 가난한 백성을 위해 자신이 받은 녹의 일부를 버린 것처럼 슬며시 놓아두던 곳이라는 속설이 있다. 오랫동안 이곳의 랜드마크는 국립보건원이었다.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대유행을 계기로 질병관리본부로 바뀐 뒤 2010년 충북 오송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대한민국 보건의 심장부였다.

 실험동·세균배양실·실험동물실…. 32개의 크고 작은 건물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불광역과 지척인 북한산 자락의 요지이지만 건물 대부분은 비어 있다. 일부 지역 주민은 대형 상업시설을 원한다. ‘강북 코엑스를 만들어달라’. 얼마 전 이런 현수막이 나붙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 강북의 많은 호텔은 문을 닫거나 고전 중이다. 은평뉴타운은 다 차지도 않았다. 수천억을 들여 빌딩만 올렸다가는 감당 불능의 상태가 될 수 있다.

 “일단 첨단도서관을 짓고 1인기업·혁신연구센터를 유치하려 합니다. 세세한 계획은 좀 더 고민해봐야 하지만요.” 서울시 노수임 담당팀장의 얘기다. 저만치 환경정책평가연구원·보건사회연구원·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 보인다. 제법 덩치가 큰 국책연구기관들이다. 질병관리본부와 마찬가지로 이미 지방으로 이전했거나 이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이 모두 떠나면 북한산의 녹번·불광동 자락은 텅 비게 된다.

 우리는 세종정부청사와 지방혁신도시 건설을 주로 정치적 시각으로 봐왔다. 서울의 입장에서 주목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빠져나가는 공공기관은 127개, 면적으로 224만㎡에 이른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 기관은 서울의 노른자위에 있다. 이전은 재앙일까, 축복일까. 구멍일까, 숨통일까.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한국이름 이만열), 하버드대 박사 출신의 경희대 교수다. 얼마 전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한국이 아시아의 새 1등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럴 만한 위대한 문화·역사·과학기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농업·농촌에서 지구촌을 이끌 희망을 본다. 다만 도시에는 혹평을 가한다. 서울은 베를린·파리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문화·정신·자연환경을 지녔지만 시민들은 이를 관리·재건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특정 지역 전체의 재개발만 중시하는 모습이다. 그 결과 한국의 도시환경은 이도저도 아닌 모습이 됐다.’

 이만열은 “서울 하면 특징 없는 고층빌딩만 떠오른다”는 수많은 이방인 중 한 명이다. 매력적인 음식·대중문화·한강·북한산이 있는데 이를 활용하지 못한다고 꼬집는다. 당장 살 집이 부족해 성냥갑 주택을 지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성장의 동력으로 삼던 때 아파트공화국은 정당성을 유지했다. 하지만 서울인구는 4년 전 정점을 찍었다. 20년 뒤에는 800만 명대로 떨어진다. 부동산 대박 시대도 갔다. 수십 년간 맹위를 떨쳤던 난개발은 수명을 다했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에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풍동(風洞)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심 곳곳에 엄청나게 큰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그 자체로도 과밀도시의 숨통이다. 더 나아가 이곳을 잘 활용할 수만 있다면 미래세대에 큰 축복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서울의 한계를 날려보낼, 창조·혁신을 내뿜는 풍동이 된다면 말이다.

 이만열은 서울 안국역 주변 등을 보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떠올린다고 했다. 활발한 문화와 과학기술, 금융이 르네상스의 토대였다. 서울에도 세 흐름이 다 있다는 것이다. 다만 흐름이 만나는 곳이 필요하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살롱이 있었다. 수많은 다빈치가 모여 문화·예술·과학 식견을 나누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생각해내면 금융이 이를 뒷받침했다. 공공기관이 떠난 자리에 우선적으로 입주할 것은 개발사무실이 아니라 살롱이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