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414)|<제47화>전국학련-나의 학생운동 이철승(2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건준」의 유혹>
45년9윌2일, 드디어 상경길에 올랐다.
사병들이 광복된 조국 여수에 도착한 뒤 서로 제 고향을 찾아 헤어질 때 나눈 「우리 빨리 서울에서 만나자」고 한 굳은 약속이 나를 더 이상 고향의 품속에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조모님의 더 쉬고 가라는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무슨 큰일이 약속된 것도 아니건만 좌우간 서울로 올라왔다.
혼잡하기 그지 없는 해방열차 호남선에 몸을 싣고 계획없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내 마음은 벌써 서울역에 닿았건만 호남선 밤열차는 거북이 걸음.
1년9개월, 스모품 병정생활의 여독도 풀리지 않았고 죽었으면 시체조차 못돌아 올줄 알았던 고향 땅에 돌아온 기쁨도 채 가라앉지 않았건만 나는 혼잣말로 되뇌며 마음을 재촉했다.
이제 「덤」으로 살게된 이 목숨, 조국의 독립과 건국의 일이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수있는 이 젊음. 어찌 한시인들 허송할 수 있겠는가.
서울역에 닿았다.
전쟁의 상처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오가는 잡민, 귀국동포, 그리고 구호와 치안을 유지하는 학생들이 뒤범벅이 된채 사람의 물결만 혼잡하게 출렁거렸다. 얘나 오늘이나 변함없는「남산」이 눈에 들어왔다.
자! 어디로 간담, 한참을 망설였다. 먼저 옛날 삼선교 하숙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나는 돈암동 방면의 땡땡이 전차에 올라탔다. 남대문을 돌아서자 길 거리가 눈에 익었다. 드디어 하숙집에 도착했다.
방문 앞을 쳐다보니 열쇠가 잠겨져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내가 쓰던 책장과 책꽂이가 먼지만 낀 채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 순간 하숙주인인 김진악 보전선배 내외분의 정한수 같은 마음씨에 가슴이 뭉클했다.
보따리를 던져놓고 원서동 숙부댁으로 인사를 갔다. 절을 받으신 숙부는 한참동안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눈이 붉어지신 숙부는 여러 가지를 물으신 뒤 계동의 인촌선생을 먼저 찾아 뵙고 오라고 했다.
계동의 인촌선생댁을 찾았다. 집은 변합이 없었으나 많은 사람이 출입했다.
인자하신 인촌선생은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더니 『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사필귀정이야』하시면서 감격의 눈물을 짓는 것이었다.
박석규 동지집도 들렀다. 그는 3대독자 외아들로 홀어머니 밑에서 살았다. 같은 보전학우로 학병에 같이 갔다 왔다.
눈물과 정성어린 첫날의 저녁상을 받았다.
나는 얼마동안은 국내 정세를 익히기로 마음 먹었다. 학병에 나간 이후 국내 사정을 전연 몰랐 거니와 해방 직후의 사정은 혼란과 무질서가 난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우후죽순처럼 급조된 온갖 단체들이 여기 저기 붙여 놓은 주의주장들은 모두가 사람들을어지럽히기에 족했다. 그당시 「화신」모퉁이의 벽보로「모자이크」한 앞에는 사람들이 몰려 나와 영문 모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애써 살피려 했다.
우익이 무엇이고 좌익이 무엇인지 뚜렷한 사상적 정립이 없는 상태에서 이 사회적 혼란이 던져주는 충격은 더욱 큰 것이었다.
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보전시절 독서회활동이래 이론적으로도 진보파의 심층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지난날 보전은사나 선배들이「건준」의 중요간부가 되어 있어서 나의 마음을 끌기도 했다.
「건준」에는 각계 각층의 지도적 인물과 여운형(위원장)이 「스포츠맨」이어서 보연전시절 체육관계 선배인 이상백 정상윤 이규현 안대경제씨 등이 가담하고 있었고 최용달(치안부) 이병학(치안부) 함병업(문화부) 이석한 이호제선배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의 나에대한 포섭·회유는 대단했다. 밤이면 숙소에까지 따라와 밤새토론을 벌이면서 온갖 유혹을다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방황 속에서도 나의 갈길을 바로 인도해주신 분은 인촌선생과 나의 숙부의 역할이 결경적으로 작용했다. 좌·우익의 갈림길에서 이러한 우연은 얼마든지 예증될 수 있었다. 가령 우촌 전진한선생의 경우나 채문식의원의 회고가 그 대표적인 일화일 것이다. 우촌선생은 일제에 저항하며 은둔생활을 금강산에서 하다 해방을 맞아 건준이 세워진 뒤에야 서울에 올라왔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건준이었기 때문에 건준의 내막이 어떤 것인지도 채 알아보기 전에 건준본부 사무실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 도중, 풍문고녀앞 건준본부 사무실을 들어서려고 하는 찰나 우연히도 그 앞을 지나치던 나의 숙부와 마주쳤다.
우촌선생과 나의 숙부는 오랜 지기관계였던 터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우촌, 어찌된 일인가? 건준본부는 무엇하러 들르려고 하는가? 여기는 표면은 각계를 망라한 것 같으나 실은 공산당계가 안방을 차지하고 있네』라고 하고 억지로 손을 잡아 끌고 나왔다고 한다. 우촌선생이 훗날 「전평」등 공산노동운동에 대항해서 싸운 대한노총의 창립자요 이 나라 노동운동의 아버지가 된 일은 다 아는 일이다.
채문식의원의 경우도 고하선생을 찾아가라는 중앙고보 현상윤 모교교장과 몽양선생을 찾아 가라는 모교 신남철선생의 엇갈린 인도의 갈림길에서 현교장 말씀에 따라 고하선생을 찾아 뵙고 그 우연으로 훗날 나와 함께 민족진영의 전위대 역할로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