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2)|<제47화>전국학련-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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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가짜장교 행세>
나는 조선학병 20여명과 함께 외로운 고성 화가산성을 뒤로하고 「오오사까」행 전철을 탔다. 「오오사까」는 문자그대로 초토가되어 철저히 파괴되고 잿더미만 가득했다. 나는 그곳서 다시 기차를 타고「하까다」(박다) 로 갔다.
1년반전 한숨을 몰아쉬며 끌려오던 철길을 이제 귀국의 희열을 싣고 기차는 달렸다. 나의 해방이 곧 조국의 해방, 정말 꿈만 같았다.
그러나「하까다」에 도착했을때 나는 크게 낙담했다. 「하까다」엔 수많은 귀국동포와 학병들을 짐짝처럼 실어다 퍼부어 놓았을 뿐 일본군 연락부대나 안내장교 하나 있지 않았다. 으례 있으려니 생각했던 귀국선은 한척도 없고 어선이나 군선도 움직이질 못했다.「니미츠」 미해군제독의 모고령에 묶여 배들이 꼼짝을 못했다.
「니미츠」 포고령이란 일본근해에 수뇌제거가 끝날 때까지 일체의 선박은 운항치 못한다는 것. 연일 귀환동포와 학병·군속들이 몰려 들었다.
줄잡아 2천여명은 됐다. 그 북새통에도 뿔뿔이 흩어졌던 학병들은 재회의 감격을 나눴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지금 내 기억에 박석규하사관(6·25때사망), 연전의 축구선수였던 김모하사관, 법전의「기무라」(목촌=창씨명), 견습사관「우에다」(직전)라고 창씨
한 목포의 우모군등 50∼60명의 옛친구들을 만난것 같다. 우리는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함께 노숙을 했다. 그러면서 선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귀국선은 어느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할일 없이 모래사장에 앉아 서쪽하늘을 바라보는게 일과였다.
일본군에게 잡혔던 미군포로들이 어디론가 줄을 지어 가는 모습도 보았다. 저 미군포로들은 그렇다치고 우리는 어떤 존재들인가.
20대전후의 젊은이들로 끌려나와 짐승처럼 부려먹히고 이제 벌판에 짐짝처럼 내동댕이 쳐진 이 비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전쟁」은 승패를 뷸문하고 최대의 죄악이며 비극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귀국선을 기다리고 있는동안 계급이 문제돼 아니꼬운 일을 겪었다. 당시 내 계급은 상등병. 그러나 조선학병끼리도 일본군 계급장이 문제돼서 먹는 것·입는것·행동하는 것에 차별을 두려했다. 내가 견습관(장교)가 못된 것은 순전히 「후데이센징」 (부령선인)이라는 성분 때문이었고 이 때문에 내가 받은 고초는 컸다.
그런데도 해방된 마당에서 조차 일본군의 계급을 의식하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로서도 행동을 달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상등병 계급장을 떼어 버리고 견습사관계급장 하나를 구해 어깨에 달았다. 일본도까지 구해찼다. 구두는 말탈 때 신는 장화여서 그대로 됐다.
사흘, 나흘 지나면서 양식은 떨어진데다 질병이 생기고 피차에 반목이 생겨 질서를 잡기 위해서도 나의 견습사관 행세는 부득이했다.
나는 가짜 계급장을 달고 질서를 잡기 시작했다. 가짜 장교가 지휘관이 된 것이다.
어느날 나는 부하 몇 사람을 데리고 인근의 일본군 부대를 찾아갔다. 마침 병참부대였다. 부대에 들어선 나는 가짜답게 더욱 으스대며 『책임자 나오라』고 큰소리를쳤다.
일본군 장교하나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쳐다보니 그의 계급은 육군소좌 였다. 소좌라면 대대장급, 아무리 가짜 계급장을 달았지만 그 계급으로도 여러중상급자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우선 기를 꺾어야 겠기에 나는 배에 힘을주고 찾아온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 1년8개월동안 우리가 당한 고생, 이제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가는 심정, 그런데 귀국선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는 것을 쭉 말했다.
『어때, 내 말이 틀렸소? 우리를 강제로 끌어 왔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고 데려다 주어야 될게 아니오?』이렇게 몰고갔다. 부대장은 얼굴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선편은 자기로서도 도리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은근히 협박을 겸해 압력을 가했다.
『이대로 두면 폭동이 일어난다. 조선은 물론 만주나 중국에 2백50만의 일본군이 있다는데 우리가 귀국해서 그들의 귀국을 방해하든가 귀환 일본인들에게 보복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잘 생각해 봐라.」
부대장은 좀 기다려 보라고 했다. 잠시후 돌아온 그는 선편은 차차 알아보겠다면서 우선 노숙이 불편할 터이니 잘때까지 자기막사를 사용하라고 했다.
말하자면 타협안을 내놓은 셈이다. 나는 그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조선학병 50여명을 부대안으로 옮겨 우선 노숙신세를 면하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귀국선.
당시「하까다」에서는 밀선을 알선해 주겠다고 금품읕 탈취하는 사건이 일본인·조선인가운데 비일비재 했다.
나는 일본인 부대장이 인상도 좋고 신분도 확실하여 그를 믿고 밀선을 부탁했다. 빨리 귀국하고 싶은 일념에서 였다.
어느 날 부대장의 부탁으로 밀선을 알아보기로한 해군중위가 민간인 한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 민간인은 자기가 선주라고 밝혔다.
우리는 즉시 약60명가량 밀선에 탈 동지들을 규합1인당 2O원꼴로 각출 한 뒤 선주와 계약을 끝냈다.
배는 60t급의 화물선, 출발시간은 하오10시,우리는 날이 어두워지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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